한국일보

삶이 눈치 보일 때

2018-11-28 (수)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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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산에서 80세 할아버지와 72세 할머니가 동반 음독자살했다. 자녀들에게 “미안하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쪽지를 남겼다. 평소 “너희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자녀들은 말했다. 수사당국은 이 노부부의 자살 이유가 할아버지를 10년간 괴롭혀온 방광암 통증 때문 보다는 자녀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였던 것으로 추정했다.

소위 존엄사 법이 한국에서도 운용된다. 공식명칭은 ‘연명의료 결정법’이다. 지난 2월 발효된 후 8개월간 2만 742명이 이 법을 근거로 연명의료의 유보 또는 중단을 결정해 목숨을 끊었다. 연명의료란 치료효과도 없이 단지 말기환자의 생명만을 연장하기 위해 시도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기 부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 4가지 의료행위를 일컫는다.

위의 부산노인은 아마도 치료불능의 말기환자라는 의사진단을 받지 못해 부득이 ‘자가 자살’을 택한 듯하다. 하지만 진작 연명의료 결정서를 제대로 작성해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들 중에도 대부분은 임종과정의 통증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자율성을 잃은 무의미한 삶의 중단, 또는 연명의료로 인한 자녀들의 심적,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존엄사 법(DWDA: Death with Dignity Act)을 1994년 주민투표를 통해 전국최초로 통과시킨 오리건주에선 1998년부터 2015년까지 존엄사를 택한 991명의 환자 중 41%가 가족에 짐이 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를 댔다. 전국 두 번째로 2008년 DWDA를 통과시킨 이웃 워싱턴주에선 917명의 환자 중 53%가 그렇게 대답했다.

존엄사 법 제정의 가장 중요한 취지는 치료불능의 말기환자들이 임종과정에서 불필요하게 겪는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통증이 두려워 존엄사를 택했다는 환자는 오리건주에서 25%, 워싱턴주에서 36%에 불과해 본말이 전도됐다. 이들이 가장 흔하게 든 이유는 자율성 상실, ‘고종명’ 실패, 삶의 질 저하 등과 함께 가족에게 주는 부담이었다.

한 말기환자 여인은 죽기 전에 존엄사를 지지하는 책을 한권 썼다. 그녀는 “통증은 경감될 수 있어 견딜만하지만 스스로 몸을 추스르지 못해 남이 나를 갓난아기처럼 다루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런 꼴을 겪는 게 통증보다 더 괴롭다”고 말했다.

물론 종교계와 의료계 일각에선 존엄사를 반대한다. 말이 존엄사지 실상은 의사의 도움을 받는 자살이라고 꼬집는다. 한 통증전문의는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의료행위의 본령이 아니며 통증은 시간만 충분하면 완화시킬 수 있고 호스피스 같은 말기환자 수용시설에도 의사가 24시간 대기하고 있으므로 통증이 존엄사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의사가 처방한 극약을 먹고 지난해 숨진 말기환자의 비율은 오리건주에서 64%, 워싱턴주에서 82%였다. 나머지는 자연사였다. 한 전문의는 많은 말기환자들이 극약처방을 받고도 끝까지 복용하지 않다가 자연사하는 원인은 약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죽을 시간과 방법을 주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민의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존엄사법은 계속 확산되는 추세다. 오리건과 워싱턴주에 이어 몬태나, 버몬트,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내년 1월1일 발효) 및 워싱턴DC가 채택했다. 지금까지 존엄사로 세상을 하직한 환자는 전국적으로 3,000여명을 헤아린다.

하지만 존엄사 논란은 연방대법원까지 가지 않는다. 대법원은 이미 1997년 워싱턴주 법원의 존엄사 불법판결을 지지했다가 그 뒤 이 문제를 각 주정부 재량에 맡겼다. 그보다는 존엄사 법의 취지가 말기환자의 통증경감이 아닌 자녀들의 부담 경감으로 바뀌고, 그에 따라 아직도 살만한 노인들이 공연이 자식들의 눈치를 받는 사회풍조로 번질까 염려된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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