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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3세대의 법칙

2018-11-01 (목)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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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큰 아들의 아들, 손자가 올해 초등학생이 되었다. 1970년대, 미국 땅에 유학 온 후 뿌리내리느라 정신없이 살았는데 어느 덧 자식들이 자식들을 낳았다. 이민 2세에서 3세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민 2세와 3세는 어떻게 다를까? 마커스 핸슨(Marcus Hansen)은 미국 이민자들의 역사와 생태를 평생 연구한 학자다. 그는 유럽 이민가족의 2세로 이민 가정의 변천사를 추적하면서 2세와 3세대 간의 뚜렷한 차이를 발견했다. “2세들은 부모의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그러나 3세들은 조부모의 뿌리를 다시 찾는다.” 이 관찰은 핸슨의 법칙 (Hansen’s Law)으로 알려지고, 그의 논문은 1941년 풀리쳐상을 받았다.

이 낯선 땅에서 2세들을 키워온 우리들은 이 말 뜻을 안다.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지 않았던가. 좀 놀라운 건 이민 세대는 동서양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대개 2세들은 영어를 못하는 1세 부모에 대한 열등감이 심하다.


짙은 액센트에 브로큰 잉글리쉬를 쓰는 1세 부모가 학교에 오면 조롱거리가 될까 봐 안절부절 하던 경험을 가진 세대다. 특히 우리 2세들은 부모들이 먹는 김치나 된장찌개를 부끄러워하고 빨리 세련되고 미국화된 세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속은 희고 겉은 노란 바나나가 많은 것이 2세란 것이다.

한인 2세 샌드라 오가 주연한 영화 ‘더블 해피니스(Double happiness)’는 이런 동양계 2세의 갈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형적 가부장인 1세 아버지가 바라는 딸의 행복과, 서구화된 2세 딸이 느끼는 행복의 개념은 한글과 영어만큼이나 다르다. 두개의 다른 문화권에 속한 1세 아버지의 바람과 2세 딸의 행복을 둘 다 만족시켜줄 수 있는 ‘더블 해피니스’는 적어도 이 영화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3세는 다르다. 훨씬 뿌리 지향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히려 너무 미국화 된 바나나 2세 부모들에 반발한다. 왜 한국인인 내게 한국말도 안 가르쳤는가 되물으며 3세들은 다시 뿌리를 찾아 나선다. 비록 영어는 못했어도 밤낮으로 일하며 뿌리의 얼을 전수하려 했던 이민 1세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강인한 생존력에 존경감을 갖는다.

우리 가문의 3세,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한글 동화 한편을 읽어준다. 7살 난 그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열심히 듣는다.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사슴은 언제나 머리에 솟은 뿔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가늘고 홀쭉한 다리가 늘 불만이었다.

어느 날, 사슴은 뿔 달린 머리를 곧추세우고 숲을 거닐다가 갑자기 사자의 추격을 받는다. 황급히 도망가려는데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뛸 수가 없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아무리 빼내려 해도 뿔이 워낙 길고 가지가 많아 꼼짝도 않는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뒷다리로 힘껏 차니 뿔이 얽힌 나뭇가지가 뚝 부러진다. 사슴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초원을 날렵한 다리로 전력 질주한다. 마침내 사자를 따돌린 후 숨을 몰아쉬며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뽐내던 뿔은 거의 나를 죽일 뻔 했는데, 평소 부끄럽게 생각했던 다리가 나를 살렸구나!”

우리 이민자들에게 뿔은 무엇일까? 겉으로 나타난 한국민의 우수성이거나 모범적 이민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결정적인 순간에 살리는 다리는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한국 이민의 뿌리 의식이라 믿는다. 강인한 실향민의 생존력이 우리를 살리는 사슴의 다리이다.

그러나 4세, 5세대로 내려가면 어쩔 수없이 미국문화에 동화됨을 부인할 수 없다. 동화되면서도 아시아계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선 매 세대마다 훌륭한 롤 모델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도산 ‘안창호’선생이나, ‘김용’세계은행 총재, 그리고 수년 전, 미역사상 최초로 워싱턴 주지사로 당선된 중국계 3세 ‘개리 록’등은 훌륭한 롤 모델이다.

이번 선거에도 여러 한국계 후보자들이 나서고 있다. 차세대 롤 모델 감들이다. 그러나 지난 30년 간 아시안 이민이 거의 6배 늘었지만 아직도 투표율은 미미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개인적 자랑이나 되는 ‘뿔’이 아니다. 이민 3세들이 다시 찾는 이민자들의 뿌리, 강인한 생존력, ‘사슴의 다리’를 가진 롤 모델들이다.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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