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법원의 정치학

2018-10-02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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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대선에 트럼프가 출사표를 던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다. 트럼프 같이 자격 미달인 인간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당 예선이 계속될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트럼프가 그동안 정치판에서 소외돼 왔던 백인 중하류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승리를 거듭한 것이다.

트럼프가 연전연승한 이유는 그동안 세계화와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고 신분 하락을 경험한 이들의 정서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세계화와 이민자 탓으로 돌리며 지지자들을 열광시켰다. 모처럼 자기를 알아주는 정치인을 만난 이들은 트럼프의 성추행 의혹과 저열한 비즈니스 관행 등 모든 약점을 덮었다.

그러나 공화당에는 백인 중하류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한 지식인과 백만장자도 많다. 나중에 가서는 이들도 대부분 트럼프 지지로 돌아섰다. 그 이유는 첫째 감세다. 공화당이 연방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화당 후보가 백악관을 차지한다면 부자들의 숙원이던 감세가 가능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트럼프가 당선된 후 공화당은 대규모의 부자 감세를 성사시켰다.


이에 못지않게 이들을 트럼프 지지로 돌린 것은 비어 있는 연방대법관 자리였다. 2016년 당시 연방대법원은 보수의 상징 안토닌 스칼리아가 급사하면서 공석이 생겼다. 보수 대 진보 대법관 수가 4대4로 갈린 상황에서 이 한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민주 공화 양당 골수 지지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였다.

당시 오마바 대통령은 온건 진보 성향의 메릭 갈런드를 지명했다. 그가 대법관으로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방상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은 아예 그의 인준에 관한 어떤 절차도 밟지 않았다. 연방대법관 후보는 대선이 끝난 후 승자가 정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긴 1992년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일 때 연방상원 법사위원장이던 민주당의 조 바이든도 대선이 있는 해에 현직 대통령이 대법관을 지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말을 했다.

어쨌든 차기 대법관은 공화당이 지명해야 한다는 보수파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트럼프는 당선됐고 되자마자 공석인 자리에 닐 고서치를 지명했다. 연방상원은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를 봉쇄하기 위해 연방대법관 지명에 60표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상원 규칙도 없애버렸다. 2013년 당시 연방상원 원내 총무이던 해리 리드가 민주당 대통령이 지명한 하위 법관과 행정부 관리들을 인준하기 위해 60표 규칙을 없앤 선례를 따른 것이다. 그 결과 고서치는 연방대법관이 됐다.

대법관을 자기 편 사람으로 채우기 위해 공화 민주 양당이 지금까지 한 일을 보면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를 둘러싼 청문회와 FBI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다. 30여 년 전 일어난 사건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 물러서기에는 공화당이 입을 타격이 너무 크다.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원에서 표결이 부결될 경우 실망한 공화당 지지자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어려운 선거판은 더 힘들게 된다.

반면 공화당이 표결을 강행해 그를 인준할 경우 분노한 미투 지지자와 민주당원들도 투표하러 나오겠지만 공화당 열성표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패배가 예상되는 하원은 내주더라도 공화당 표밭인 노스다코타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리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의원을 떨어뜨리고 상원 다수당 지위를 지킬 수도 있다.

지금 공화당으로서는 하원보다 대법관 인준권이 있는 상원이 더 중요하다. 상원 다수당을 유지할 경우 향후 2년 동안 연방대법원 공석이 생기면 보수파 대법관을 하나 더 앉힐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대통령과 연방 상원의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후까지도 미국 내 주요 현안의 최종 결정권자인 대법원을 보수파 수하에 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캐버너의 성폭행 진실 여부와 앞으로 있을 연방상원 표결 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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