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유능한 도박사

2018-09-25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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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도박사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집요함과 끈기다. 몇 번 나쁜 패가 들어와 돈을 잃어도 크게 상심하지 않는다. 좋은 패와 나쁜 패가 번갈아 들어오는 것은 게임의 조건으로 담담히 받아들인다. 두번째는 상냥함이다. 뛰어난 도박사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경계심을 누그러 뜨린다.

세번째는 자기 통제력이다. 좋은 패가 들어오건 나쁜 패가 들어오건 얼굴 표정이 바뀌지 않는다. 네번째는 자기 학습력이다. 도박의 트릭을 꿰뚫고 실수를 했을 때는 좌절하기보다 자기 개선의 계기로 삼는다. 다섯번째는 자신감이다. 위 네가지 자세를 습관화 해 얻은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지금 세계 정치인 가운데 뛰어난 도박사 기질을 가진 사람을 하나 들라면 누구를 꼽아야 할까. 아마도 김정은이 아닐까. 2011년 김정일이 급사하고 27살의 김정은이 권좌를 물려받았을 때 그가 오래 가지 못하리라 본 사람은 많았다. 수십년간 김일성 밑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아온 김정일과 달리 그는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국내 정치기반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친어머니 고용희는 북한에서 2류 시민인 재일교포 출신이다. 거기다 엄연한 장자인 김정남과 오랜 시절 북한의 2인자로 군림해온 장성택이 살아 있었다. 경제는 엉망이고 핵도 미사일도 없었다.


그 후 7년이 지난 지금 장성택과 김정남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김정일의 운구차를 호위하던 올드 보이들도 모두 사라졌다. 핵과 대륙간 탄도탄 개발에 성공하고 경제는 각종 제재에도 불구하고 7년 전보다 좋아졌다.

외교 감각은 미숙할 것이란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올 들어 시진핑과 3번 만나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문재인과도 3번 만났으며 북한 지도자로는 처음 미국 대통령과도 회동했다. 미국 대통령과 만나 중국과 거리를 두는 척 하며 소원했던 북중 관계를 급속히 복원시키는가 하면 시진핑과 우의를 돈독히 하며 대미 협상력을 강화시켰다.

문재인과 만나서는 “우리 도로 사정이…불편합니다” “우리 숙소라는 게 초라하죠” 등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일 줄 아는 것은 자신감에 찬 강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은 GDP로 따져 30~40배가 차이가 나고 첨단 기술이나 재래식 무기 모두 남한은 북한을 압도한다. 인구도 2배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김정은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첫째는 겨울을 앞둔 다람쥐가 도토리 쌓아놓듯 그동안 만들어둔 핵무기일 것이다. 아무리 한국이 경제력과 재래식 무기에서 앞서 있다한들 원자탄 몇발이면 대한민국 전체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대북 제재가 걸리적 거리기는 하지만 시간은 자기 편이란 생각도 있을 것이다. 핵 폐기 협상이란 것이 빨라야 몇년이고 길면 무한히 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달랑 6개의 핵무기를 개발한 후 유일하게 자진해서 폐기한 남아공의 경우 폐기 선언을 한 후 국제원자력기구가 확인하기까지 6년이 걸렸다.

미국과의 무역 분쟁으로 심기가 뒤틀린데다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새삼 인식한 중국의 대북 제재 완화는 시간 문제고 문재인 정부는 핵 폐기 여부와 관련없이 재벌 총수들을 대동하고 찾아와 제발 투자를 할 수 있게 문을 열어 달라고 성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정은에게는 시간이 있다. 경제 실정으로 나날이 지지도가 추락하고 있는 문재인으로서는 대북관계 개선만이 유일하게 정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수단이다. 중간선거에서 참패할 경우 탄핵 위기에 직면하게 될 트럼프도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핵 폐기에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어 애가 타고 있다.

포커 페이스 김정은에게 착하기만 한 얼굴의 문재인이나 떠벌이 트럼프는 오픈 북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이들의 남은 임기가 수년인데 비해 김정은은 집안 내력인 심장만 제대로 뛰어준다면 앞으로 수십년 집권은 무난하다.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가 있는 셈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앞으로 한반도 상황은 김정은이 원하는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일성 일가는 다른 것은 물라도 어떻게 해야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해 나가느냐는 문제에 관한한 독보적 능력이 있는 집안이다. 경적(輕敵)은 필패다. 요즘 김정은의 행보는 북한과 김씨 일가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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