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신의 계절

2018-09-1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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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지옥에 대해 가장 깊게 연구한 사람의 하나를 들라면 단테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대표작 ‘신곡’에서 사후 세계를 지옥과 연옥, 천국으로 구분해 놓고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어디로 가는 지를 자세히 묘사해 놓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죄 중 가장 가벼운 것이 욕정, 식탐, 탐욕 등 육체적 욕망을 이기지 못한 죄다. 그 다음은 분노, 폭력 등 화를 참지 못한 죄고, 가장 무거운 것이 사기와 배신의 죄다. 이성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인데 이를 악용해 남을 속이는 것은 죄질이 나쁘며 그 중에서도 자신을 믿은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배신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행위로 본 것이다. 지옥 밑바닥에는 스승이자 창조주의 아들 예수를 배신한 유다가 악마에 의해 두개골을 씹히는 벌을 받고 있다.

요즘 미국에서 트럼프만큼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지난 8월 백악관 최고위 흑인 보좌관으로 있던 오마로사 마니골트가 해임된 후 트럼프를 여성 비하 인종차별주의자로 공격한 데 이어 수십년 간 개인 변호사로 일해 온 마이클 코언은 선거자금법 등 8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후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것은 트럼프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실토했다.


코언과 대조적으로 세금과 은행 사기 8개 혐의에 대해 유죄평결을 받은 전 트럼프 대선 캠페인 본부장이었던 폴 매너포트가 연방검찰과의 협상을 거부하자 트럼프는 “코언 같은 사람은 채용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한다”면서 반면 매너포트에 대해서는 압력에 굴하지 않은 “용감한 사람에 대한 큰 경의를 표한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매너포트가 지난 주 돌연 입장을 바꿔 2016년 트럼프 대선캠프와 러시아와의 유착 관계를 수사 중인 특별검사와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중간선거를 50일도 채 안 남겨둔 공화당에 비상이 걸렸다. 트럼프 지지율이 30% 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주 트럼프 지지율은 CNN에 따르면 37%, 퀴니팩 대와 NPR 38%로 추락했고 갤럽은 겨우 40%를 기록했다. 공화당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중간선거 결과를 좌우할 무당파내에서 트럼프 지지율의 폭락이다. 지난 8월 47%에 달했던 이들의 트럼프 지지는 9월 들어 31%로 급락했다.

트럼프 골수 지지자들은 이런 조사결과를 모두 ‘가짜 뉴스’로 몰아 부치며 짐짓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공화당 지도부의 반응은 다르다. 이들은 공화당의 아성인 텍사스의 중진 연방 상원의원으로 얼마 전까지 당선이 확실시 되던 테드 크루즈마저 낙선이 우려된다며 그를 위한 지원사격에 총력을 쏟고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최측근들 입에서 트럼프에 불리한 증언이 나올 경우 공화당은 연방하원은 물론 수성이 예상되던 연방상원에서의 다수당 지위도 내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연방 상하원을 민주당이 장악하게 되면 트럼프 탄핵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며 트럼프가 탄핵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식물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측근들의 잇단 배신에 치를 떨고 있을 트럼프 모습이 딱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 행위를 배신이라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와 리얼리티 쇼를 함께 진행하며 그의 언행을 목격한 오마로사는 이를 덮고 대선 기간 “트럼프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를 외치며 백악관 보좌관에 발탁됐다. 어차피 트럼프와 믿음을 주고받으며 진영에 합류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상대방을 이용했을 뿐이다.

수십년 간 그의 개인 변호사로 일하며 지저분한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온 코언도 마찬가지다. 트럼프가 포르노 스타와 플레이 모델과 관계를 맺으면 그 입막음으로 돈을 쥐어주는 것이 본업이었던 그가 트럼프를 인간적으로 신뢰해 변호사로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때 트럼프 대선 캠프 본부장이었던 매너포트 또한 필리핀의 마르코스부터 자이레의 모부투 세세 세코,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등 독재자들의 돈 관리 및 이권 옹호를 위해 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 또한 트럼프와의 연줄을 자신의 로비 비즈니스에 이용하려 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배신이 성립하려면 서로 간에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트럼프 잇단 등 돌리기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트럼프 처세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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