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불황의 추억

2018-09-11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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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4일 뉴욕 연방 은행은 베어 스턴스 투자 은행에 대한 250억 달러의 긴급 구제 금융을 승인했다. 85년의 역사와 4,00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이 회사가 망할 경우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에 미칠 파장이 어마어마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 금융 당국이 투자 은행에 대한 구제에 나선 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처음이다. 베어 스턴스는 이틀 후 주당 2달러에 JP 모건 체이스에 매각에 합의했다. 이 회사 주가는 2007년 초만 해도 170달러가 넘었다.

그리고 6개월 후인 9월 15일 158년의 역사와 6,40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했다. 미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연방 정부가 베어 스턴스는 구제하고 리먼을 망하게 한데는 당시 재무장관이던 행크 폴슨이 리먼과 사이가 나빴다는 것부터 월가에 대한 미국인들 감정이 그동안 악화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차피 모든 금융 회사를 구할 수는 없으며 어디선가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리먼 파산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신속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주가가 폭락했다.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9월 11,000대에서 다음 해 초 7,000 이하로 추락했다. 금융 시장에서 유동성은 사라지고 연쇄 도산의 공포가 세계를 뒤덮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인 ‘대불황’의 시작이었다.


대불황도 대공황처럼 자산 버블에서 시작됐다. 90년대 말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하이텍 주식들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으면서 미국인들은 너도나도 신흥 기술주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주식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누구는 아무개 닷컴 주식을 사들여 떼돈을 벌었다더라”는 하는 것이 일상적인 화제가 됐다.

그러나 2000년 초 하이텍 버블이 터지면서 한 때 5,000을 돌파했던 나스닥은 2002년 1,000대로 떨어졌다. 시장 가치의 80%가 날아간 것이지만 이는 평균이고 휴지가 된 주식도 부지기수였다. 주가 폭락과 함께 대공황이 찾아 온 것을 기억하고 있던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는 연방 금리를 1%로 내리는 등 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불황은 짧게 지나갔으나 이번에는 부동산 시장이 불붙기 시작했다. 모기지 금리가 초저 수준으로 내려가자 넘치는 돈은 주택 시장으로 몰려들었고 집값은 자고 일어나면 올랐다.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집값이 중단 없는 상승을 거듭하자 “집값은 절대 하락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미국인 사이 종교적 신념으로 굳어졌다. 주택을 구매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까지 무리해서 사기 시작했고 은행과 제2 금융권은 직업도 수입도 없는 사람이 허위로 만들어낸 ‘거짓말쟁이’ 융자 신청서를 눈감고 승인해줬다. 이렇게 만들어진 주택 담보 채권은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투자 은행으로 넘어갔고 이들은 이를 안전한 투자 상품인 것으로 포장해 판매했다.

위험 신호는 2006년부터 나타났다. 향후 주택 경기를 예고하는 주택 건설자 지수는 이 때부터 정점을 찍고 하락세로 돌아섰다. 2002년부터 5년째 오르던 다우 지수도 2007년 가을 최고치를 기록한 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리먼 사태가 터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공황’인 대불황으로 870만명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률은 10%로 급등했으며 1,000만명이 집을 빼앗기고 평균 주택가는 반 토막이 났다. 금융 위기 발발 10년 이 된 지금 실업률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평균 집값은 위기 전 수준을 회복했지만 인플레를 감안한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10년 전과 차이가 없다. 상위 5%의 소득만 10% 올랐을 뿐이다. 주식과 부동산 등 주요 자산 대부분이 이들 소유로 경기 회복의 과실은 이들에 집중됐으며 빈부 격차도 어느 때보다 벌어지고 있다. 악화되는 백인 중 -하류층의 삶의 질과 이들의 지지를 받는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 우연의 일치가 아님은 물론이다.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의 반복은 변하지 않는 세상의 근본적인 원리다. 그러나 호시절이 오래 계속되다 보면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장기간의 안정 속에 불안정의 싹은 자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고 고통이 찾아와야 정신을 차린다. 호황 속에서 위험의 기미를 읽고 불황 가운데 희망의 싹을 보는 것이 현명한 삶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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