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이는 낙태논쟁

2018-09-06 (목)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작게 크게
한국으로 ‘의료여행’을 떠나는 한인들이 많다. 최소한 석달만(앞으론 6개월로 연장 예정) 체류하면 재외국민 보험에 가입해 미국에서보다 훨씬 싼 비용으로 고품질 의료시술을 받을 수 있어 왕복 항공요금을 제하고도 남는 장사란다. 쌍꺼풀수술을 원하는 젊은 여성들, 종합검진을 받으려는 중년 남자들, 임플랜트 전문 치과병원을 찾아가는 노인들도 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아마 임신중절(낙태) 수술을 하러 가는 여성들도 있을 듯하다. 미국에선 비용에 앞서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한국에 가도 별 수 없다. 지난주 한국정부가 낙태시술 의사들을 1개월 자격 정지시키기로 결정하자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크게 반발, 앞으로 낙태수술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후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여성들의 낙태수술이 자그마치 연간 50여만 건으로 추산된다는 보고서(배재대학)가 지난해 말 발표됐다. 금년 초 한국 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서도 여성 10명 중 4명 이상이 낙태를 경험했고 이들 중 97% 이상이 불법시술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많았고, 20대 이하가 30대 이상보다 많았다. 학업, 경제형편 등이 두드러진 사유였다.


한국에서만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요즘 낙태수술 합법화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선 지난달 8일 의사당 앞에 200여만 명의 군중이 집결해 찬반시위를 벌였다. 찬성쪽은 초록색, 반대쪽은 파란색 스카프를 둘렀다. 두달 전 사상 처음 하원을 4표차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낙태합법화 법안은 이날 상원에서 31대 38로 부결됐다.

하지만 역시 전체 인구의 88%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에선 지난 5월 낙태허용을 위한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진 끝에 66.4%의 찬성으로 통과돼 헌법의 관련 금지조항이 폐지됐다. 이에 따라 임신 24주까지도 상황에 따라 낙태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개 회원국(80%)이 임신 12~24주까지 낙태수술을 허용하고 있다.

영국정부는 지난주 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집에서’ 두 번째 낙태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현재 관련법은 임신중절을 원하는 여성들이 첫 번째 약(mifepristone)과 두 번째 약(misoprostol)을 임신 10주 내에 병원에서 24~48시간 간격을 두고 복용토록 규제하고 있다. 웨일스와 스코트랜드 정부는 진작부터 낙태약 가정복용 조치를 시행 중이다.

미국인들의 낙태 논쟁은 극성스럽다. ‘선택권파(Pro-Choice)’와 ‘생명존중파(Pro-Life)’의 싸움이 끊일 새 없다. 새 대법관이 지명될 때마다 그가 선택권파인지, 생명존중파인지에 초미의 관심이 쏠린다. 이번에 지명된 브렛 캐버노도 마찬가지다. 그가 ‘로 대 웨이드 재판’을 기정사실로 존중한다고 말은 하지만 임명권자인 트럼프 대통령을 거역할리는 없다.

‘로 대 웨이드 재판’은 연방대법원이 1973년 내린 낙태 합법판결이다. 노마 맥코비(가명 제인 로)가 텍사스주 댈러스 카운티 검사장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었다. 떠돌이였던 맥코비는 셋째 아기를 임신하자 강간당했다며 합법 낙태수술을 받으려다가 증거불충분으로 거짓말이 탄로나 기소됐고 재판 종료 전에 출산했다. 그녀는 지난해 사망했다.

연방대법원은 제 14 수정헌법의 프라이버시 관련조항을 확대해석해 낙태수술을 7-2의 압도적 표결로 합법화했다. 맥코비는 즉각 선택권파의 영웅으로 떠올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얼마 안 돼 개신교로, 그 뒤 다시 천주교로 개종하면서 열렬한 생명존중파로 변신했다. 그녀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번복시키라며 연방의회에서 증언까지 했다.

기독교인들은 창조주가 낙태는커녕 피임도 금한다고 강조한다. 낙태가 불가피할 수는 있지만 출산율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0%대에 직면한 한국에서 신생아(32만명)보다 훨씬 많은 생명(50만명)이 낙태로 스러지는 건 서글프다.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