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증오범죄인가, 사회주의는

2018-09-04 (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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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Death of one man is a tragedy, death of a million is a statistic) -. 스탈린이 한 말로 전해진다.

‘110,000,000.’ 20세기를 휩쓴 사회주의운동 와중에 희생된 사람을 숫자로 나타낸 것이다. ‘데모사이드’의 저자 R J 러멜 같은 사람은 사회주의 정권에 의한 고의적 민중학살(democide)에 희생된 사람까지 합칠 때 그 수치는 2억6000여 만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했다.

말이 쉬워 1억, 2억이다. 고대 로마 전성기 때 팍스로마나 권(圈)의 총인구는 7,500여만이 최대치였다. 그러니까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 문명권의 전체 인구가 모두 학살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피로 얼룩진 그 사회주의가 새삼 제철을 만났다. 미국의 캠퍼스 분위기가 그렇다. 사회주의자는 새로운 셀러브리티(celebrity)인 양 대접을 받고 있는 것 미대학가의 오늘날 풍속도다.

미국 진보세력의 이 같은 좌편향과 관련해 미국의 보수정치학자 제임스 피어슨은 한 가지 명제를 내걸었다. ‘사회주의는 증오범죄(hate crime)인가’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고문, 수용소군도, 대학살로 점철돼 있다. 20세기에 비해 그 규모는 줄었지만 북한, 쿠바, 베트남, 그리고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오늘날에도 비극은 되풀이되고 있다. 이 현실에 빗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의 본질이랄까, 그 변치 않는 속성에 대한 경각심도 새삼 일깨우고 있다.

“파워를 쥐지 못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다양성을 외치며 스스로 사회 민주주의자임을 표방한다. 권력을 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권위주의, 더 심하면 전제정치로 돌변한다.” 피어슨의 지적이다.

“사회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인도주의적 약속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만행(barbarism)으로 끝난다.” 피어슨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일종의 정치적 신조일 뿐이다. 결코 보편적인 경제적 이론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주의적 잣대를 들이대고 경제를 운영하려 든다.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대파국으로 끝난 과거 소련체제,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김일성 세습왕조 북한의 참담한 실정, 그리고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맞은 오늘날 상황 등이 바로 그 증거다.

사회주의 노선의 정책이 실패로 판명된다. 그 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책임의 윤리는 실종됐다. 신념의 윤리만 따른다. 사회주의자들의 특징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려들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이상을 성역시 함으로써 이념이 재앙을 불러왔어도 잘못을 부인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자 지도자들이 보이는 일반적 성향이라는 것. 아니, 오히려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 희생양이고, ‘반혁명세력의 음해’, 혹은 적폐세력 등이 운위된다.

이와 동시에 동원되는 것이 과도한 국가주의다. 사회주의 국가는 항상 정의롭다는 주장과 함께. 그 극단은 민중학살(democide)의 형태로 표출되기까지 한다. 사회주의는 그러므로 증오범죄, 더 나가서는 반인륜범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피어슨의 주장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주장으로도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이 길어진 것은 경제에서 안보에 이르기까지 문재인정부의 정책노선과 관련해 뭔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어 보여서다.

고용참사와 소득양극화를 불러왔다. 문재인정부의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정책이 가져온 결과다. 핵심지지계층인 서민층도 아우성이다. 그런데도 요지부동, 그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란 걸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통계청장 인사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도대체 왜.

“소득주도 성장론은 이론이기 보다 이념에 가깝다.” 국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 기저에는 대기업 등 기존 경제주류 세력을 ‘적폐’로 규정하는 진영논리가 숨겨져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소득주도 성장론 밀어붙이기는 사회민주주의와 국가주의란 방식을 통한 주류세력교체 시도에 다름이 아니라는 거다.

우려스러운 것은 그 주류세력 교체 정책을 정권내부의 소수 진보그룹이 주도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진영논리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사실로, 북한 인권정책에도 진영논리라는 그 이념적 당파성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고 있다.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그러나 내부의 문제에는 관대하다. 진영논리에 갇힌 권력의 모습이다. 국내 인권문제에는 꽤 까다롭다. 그런데 북한주민 인권문제에는 완전 무신경이다. 아니, 오히려 국내 인권단체들에 대한 계좌추적과 압수수색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

무엇을 말하나.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다 그 북한인권 참상을 문재인 정부는 진영논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초록은 같은 색(草綠同色)의 심정으로. 그러니 그토록 관대한 것이다.

그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특사를 파견한다. 문재인-김정은 3차 정상회담의 구체적인 개최 일정과 남북관계 발전,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 정착 등을 위해서라고 한다. 싱가포르 프로세스도 와해됐다. 들려오는 것은 한미공조 파열음이다. 한미동맹이 와해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평양행을 고집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 몹시 서두르는 모습이 왠지 불안하기만 하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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