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탄핵의 그림자

2018-08-2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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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마구’는 1949년 UPA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만화 캐릭터다. 돈 많고 통통하며 키가 작은 마구는 눈이 잘 안 보여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지만 운이 좋아 늘 무사히 살아남는다. 지금은 잊혀 졌지만 한 때는 디즈니 만화영화와 맞먹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단편 만화 부문 오스카상을 두 번이나 받기도 했다.

먼 훗날 미국 법무장관이 ‘미스터 마구’라는 별명을 갖게 되리라고는 영화 제작자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트럼프가 자신이 임명한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을 “미스터 마구”라고 불렀다고 보도했다. 가만히 둘을 비교해 보면 닮은 점이 많다. 별명을 잘 지은 것 같은데도 트럼프는 이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은 ‘미스터 마구’라는 만화 자체를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다. TV 중독자인 트럼프가 60~7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구’를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요즘 트럼프 보고 법무장관 별명을 붙여 보라면 ‘마구’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다. 그의 세션스에 대한 분노가 폭발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주 팍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법무부를 장악하지 못한 인간에게 직책을 맡겼다”며 “그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것은 오로지 그가 2016년 대선 캠페인 때 충성심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연방 상원의원이던 세션스는 공화당 의원 중 가장 먼저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었다.


트럼프의 이런 공개적인 비난에 대해 평소 말이 없던 세션스도 “내가 법무장관으로 있는 한 법무부가 정치적 고려로 부적절한 영향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트럼프가 이처럼 세션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특별 검사가 자신의 목을 조여 오고 있는데도 세션스가 스스로를 제척한 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2016년 트럼프 대선 캠페인에 합류했던 자신이 이 때 러시아와 트럼프 팀이 공모했는지 여부를 조사하는데 관여하는 것은 조사가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을 낳게 할 수 있기 때문으로 적절하면서 당연한 결정이다. 그럼에도 특별 검사 해임 권한을 가진 세션스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이 트럼프에게는 참을 수 없는 배신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트럼프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특별 검사와 세션스만이 아니다. 지난 주 그의 캠페인 매니저였던 폴 매너포트는 탈세와 사기 등 8건의 기소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받았고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은 트럼프가 플레이보이 모델과 포르노 배우와 맺은 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돈을 지불함으로써 선거법을 위반했으며 이는 트럼프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백악관 법률 고문인 도널드 맥간이 특별 검사의 수사에 협조하고 있다는 보도에 이어 트럼프 비즈니스를 총괄하는 ‘트럼프 조직’(Trump Organization)의 재정 책임자 앨런 와이셀버그와 트럼프의 오랜 친구이자 성추문 당사자의 이야기를 사들인 후 묻어버리는 일을 전문으로 해온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발행인 데이빗 페커가 연방 검찰과 면책 협정에 합의했다. 면책 협정이란 검찰이 원하는 정보를 주는 대신 자신은 기소 대상에서 제외해 준다는 약속이다.

이와 동시에 그를 가장 먼저 지지했던 뉴욕 연방 하원의원 크리스 콜린스와 가주 연방 하원의원 던컨 헌터는 각각 내부자 거래와 선거 자금 남용 혐의로 기소됐다. 이와 때맞춰 오로지 자신에 대한 충성심만 보고 트럼프가 백악관 고위직에 임명해준 오마로사 매니골트가 해고당한 후 트럼프의 추한 면모를 폭로한 책 ‘Unhinged’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처럼 많은 배신과 악재가 동시에 터지기는 힘든 일이다.

1974년 닉슨 사임은 1973년 10월 20일 아치볼드 칵스 특별 검사 해임을 거부한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과 윌리엄 러클하우스 부장관을 해임하면서 시작됐다. 그 밑에 있던 로버트 보크 차관이 해임을 통고해 칵스는 물러났으나 이는 의회와 미 국민의 분노를 사 탄핵 여론이 처음 과반수를 넘는 계기가 된다.

잇단 측근들의 배신으로 분노와 초조에 떨고 있을 트럼프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제정신을 잃고 세션스를 해임한다면 그 때가 트럼프 몰락의 시점이 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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