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를 대중주의자라 부르지 말라

2018-08-13 (월)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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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를 대중주의자라 부르지 말라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도널드 트럼프를 ‘대중주의자’(populist)라고 부르는 언론에 한마디 제언을 하고자 한다: 트럼프를 가리켜 대중주의자라 일컫는 것은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트럼프가 가끔 엘리트층에 맞서 평범한 미국인 근로자들의 권익을 지키는 대변인인 양 행세하는 게 사실이다. 트럼프가 대놓고 백인 민족주의를 포용함에 따라 그의 인종주의 견해를 공유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자신의 편견을 밝히지 못하는 평범한 미국인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견해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한지 이미 1년 반이 지났다. 이제는 그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 따라 평가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흐른 셈이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는 모든 면에서 숨 막히는 반 근로자 기조를 유지했다. 트럼프를 대중주의자라 부르는 것은 그가 경건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그는 절대 대중주의자가 아니다.

트럼프의 주요 입법성과로 꼽히는 세금정책부터 살펴보자.

기업들의 법인세를 대폭 삭감해준 감세는 근로자들의 임금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트럼프 감세가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기에 공화당은 이를 중간선거에 활용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행정부는 부유층에게 추가로 1,000억 달러의 세금을 깎아주는 행정조치를 발동하는, 아마도 불법적인 아이디어를 매만지고 있다.

의료보험정책도 마찬가지다.

근로가정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을 오바마케어 폐기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트럼프는 거의 20%의 보험 프레미엄 인상을 불러올 파괴공작을 구사하고 있다.

프리미엄 인상에 따른 부담은 약간의 기준소득 초과로 정부 보조금 혜택을 받을 자격을 상실한 상위 근로계층이 가장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노동정책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는 근로자들을 착취와 부상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규정들을 폐지하기 위해 다방면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눈앞의 정책들만이 전부가 아니다. 트럼프의 인사도 살펴보아야 한다.

노동정책 입안을 위해 트럼프는 아부꾼들을 모아 팀을 구성했다. 팀 내부의 요직은 로비스트, 혹은 업계와 강력한 금전관계를 가진 자에게 돌아갔으며 노동단체는 완전히 배제됐다.

브렛 캐버노 판사의 대법관 지명은 특별히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상원 공화당이 그에 대한 추가 정보를 공개하라는 공화당의 요청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캐버노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극우적인 공화당원이나 주류의 우파보다 노동계에 훨씬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캐버노의 극단적 반 노동자 견해는 시월드의 킬러 고래가 여직원을 공격해 사망한 사건과 관련한 소송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피해자가 취업 당시 자신의 업무가 지닌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시월드 측에는 보상책임이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의 극단적 반 노동자 정서를 보여주는 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캐버노가 지명 인준을 받는다면 종신직인 대법관직을 오랫동안 유지할 것이고, 따라서 그의 극단적 반 노동주의는 인준거부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대통령이 캐버노 판사에 힘을 실어주고, 공화당이 흠이 될 만한 그의 과거 기록을 덮으려 드는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연유로 미국인 근로자들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트럼프가 캐버노를 대법관으로 지명했을까? 무엇 때문에 트럼프는 자신의 백악관 입성을 도운 유권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나 역시 거기에 대한 대답은 모르지만 정책세부사항에 지극히 무지한 트럼프가 자신도 모르게 공화당 정통주의에 사로잡혔다는 종래의 설명은 대통령을 평가절하 하는 동시에 그를 실제보다 근사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트럼프의 행동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지지기반에 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크고 작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기 좋아한다. 짐작컨대 트럼프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를 따르는 지지자들을 지켜보며 쾌감을 느낀다.

사실 노동계층 지지자들에 대한 그의 조롱은 가끔씩 밖으로 그대로 튀어나온다.

“나는 교육수준이 낮은 자들을 사랑한다”라거나 “핍스 애비뉴에서 내가 누군가를 총으로 쏜다 해도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조롱 섞인 주장을 기억하라.

어쨌든 그의 동기가 무엇이건, 트럼프의 행동은 대중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벌이는 무역전쟁 또한 그 같은 판단을 바꾸지 못한다. 남북전쟁이후의 호황기를 일컫는 도금 시대(Gilded Age) 대통령으로 포퓰리스트 도전자를 물리친 윌리엄 맥킨리도 보호주의자였다.

게다가 트럼프의 무역전쟁은 최저 베니핏에 대한 대가로 미국 근로자들에게 최대 해악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대중주의자는 아니지만 트럼프는 병적인 거짓말쟁이고, 미국의 최고위직에 오른 가장 부정직한 인물이다. 그리고 자신이 미국인 근로자들의 편에 서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그가 내뱉은 최대 거짓말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다시 언론매체들이 트럼프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대중주의자”라는 용어로 돌아가자. 트럼프가 대중주의자를 자처할 때마다 언론이 이를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은 그의 거짓말에 동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객관적 보도라는 문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구태여 대중주의자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트럼프에게 합당치 않은 크레딧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가 하는 일을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속이고 있다. 언론은 그가 하는 사기행각을 거들 필요가 없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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