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형당하는 사형제도

2018-08-08 (수)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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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0년전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을 안가 술자리에서 저격 살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처형된 후 한 때 그의 명예회복 운동이 일었었다. “독재자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막아 민주화를 이루고 악화일로의 한미관계를 회복시키려 했던 그는 사형은커녕 오히려 안중근과 윤봉길 반열의 의사(義士)로 추앙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박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후 김재규 묘소의 참배객 수가 부쩍 늘어났다고 들었다. 박통 부녀의 비극적 말로에 비추어 김의 10?26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아졌다는 뜻일 수 있다. 아울러 한국에 사형제도 자체가 없었다면 사건 후 7개월 만에 처형당한 김이 살아남아 그의 명예회복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라는 논리도 있었다.

사형제도 폐지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오래 동안 논란돼 왔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지구촌의 102개 국가가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한국을 포함한 32개국은 사형제도를 유지는 하되 시행하지 않아 사실상 폐지한 상태다. 그런데도 지구촌 인구의 60% 이상이 사형제도 권역에서 살고 있다.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미국 일본 등 인구가 많은 나라들이다.


하지만 전 세계 사형 폐지론자들이 이틀 전 천군만마의 성원을 얻었다. 세계 12억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지도자인 프란시스 교황이 “사형은 어떤 경우든지 용납될 수 없으며 천주교회는 지구촌에서 사형제도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노력하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가톨릭의 핵심 가르침을 담은 교리문답서에 프란시스 교황의 결정을 즉각 수록했다.

하지만 프란시스의 결정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그는 2013년 즉위 이후 줄곧 사형제도 폐지를 주창해왔다. 미국 연방의회 연설(2015년)에서도 “모든 생명이 신성하고 모든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부여받았다. 인간인 죄수를 사형이 아닌 재활훈련을 통해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만이 인간사회에 이득이 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의 사형반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78년 즉위한 요한 바오로 2세와 2005년 그를 승계한 베네딕트 14세가 이미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사형제도를 폐지하도록 촉구했었다. 더욱이 기독교의 사형제도 반대는 필연적이다. 교회 창시자인 예수(사흘 만에 부활했지만)를 비롯한 그의 수제자들이 극악무도한 사형제도의 대표적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교황의 교리변경이 미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미국은 워싱턴주를 포함한 31개 주가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전체 국민의 54%가 사형제도를 지지하고 39%가 반대한다. 백인 개신교회 신자들의 지지율이 가장 높다. 미국 성인 5명 중 1명이 가톨릭 계열임을 자처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민자이며 그 대부분이 히스패닉이다.

워싱턴주는 진보색채인데도 1981년 사형제도를 부활시켰다. 그 후 3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5명이 집행됐지만 지금은 제이 인슬리 주지사의 모라토리엄(일시 중지명령)으로 사형집행이 멈춘 상태다. 킹 카운티의 댄 새터버그 검사장은 사형수 기소비용이 무기수보다 3배 많은 평균 150만 달러나 든다며 검사답지 않게 사형 폐지를 주창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에서도 1997년 12월 30일 살인, 강간 등 흉악범 23명이 한꺼번에 처형된 후 지금까지 20여년 간 잠잠하다. 한국의 원조 사형수 가운데 조봉암이 있다. 1959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현직 이승만에게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다. 그는 처형 전 집전목사에게 누가복음 23장 22~23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예수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는 장면이다.

미국에선 지난 한해 41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23명이 집행당했다. 남북미 대륙에서 사형집행이 9년 연속 유일하게 이뤄졌다. 미국의 사형제도가 유지되건, 폐지되건 나를 포함한 대다수 한인들은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찜찜하긴 하다. 사람 목숨이 날로 파리 목숨 같아지는 미국에서 그나마 사형제도까지 사라지면 흉악범들이 더 날뛸 것이기 때문이다.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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