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 사회의 새 이정표

2018-08-07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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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팍스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사는 평범한 재봉사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미국 민권 운동의 상징이다. 연방 의회는 그녀를 “민권 운동의 퍼스트레이디” “자유 운동의 어머니”라고 불렀고 그녀의 동상은 연방 의회를 장식하고 있다.

그녀의 이런 변신은 어찌 보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1955년 12월 1일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그녀는 흑백으로 분리된 좌석 중 흑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승객이 늘어나 백인 자리가 다 차자 버스 운전사는 그녀에게 일어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몽고메리 시 조례는 백인 자리가 다 차면 흑인 승객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고, 버스가 다 차면 버스에서 내리게 돼 있었다. 팍스가 이를 거부하자 운전사는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체포 이유를 묻는 팍스에게 “법은 법”이라며 그녀를 연행해 갔다.

어쨌든 이 사건은 몽고메리에 새로 부임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을 촉발시켰고 이는 수많은 흑인들과 양심 있는 백인들의 피땀 어린 투쟁 끝에 흑인 등 소수계 민권 보호와 투표권을 보장하는 1964년의 연방 민권법과 1965년의 연방 투표권법 제정으로 이어진다.


지난 5월 LA 한인사회는 1960년대 한인 커뮤니티가 생긴 이래 드물게 중요한 두 가지 도전에 직면했었다. 하나는 LA시장과 LA시의회 의장의 일방적인 코리아타운 내 임시 홈리스 셸터 설치 발표였다.

LA에 홈리스 문제가 심각하며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셸터가 필요하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코리아타운 한 가운데인 버몬트와 7가에 주변 상가와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홈리스 셸터를 마련하면서 인근 주민이나 상인들의 의견을 들어보려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에게는 이번 결정이 법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 하며 아예 이를 반대하는 한인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공청회 출입을 막기까지 했다.

이런 시정부의 고압적인 자세는 한인들의 분노를 샀으며 5월부터 7월초까지 수 천 명의 한인들이 코리아타운에서 7차례나 시위를 벌이며 강력히 항의했다. 뜻밖의 한인들의 결집된 힘에 놀란 허브 웨슨 시의회 의장은 결국 사과와 함께 지난 2일 셸터 부지를 한인타운 밖 윌셔와 후버 일대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윌셔커뮤니티 연합을 비롯한 한인 단체 지도자와 한인들이 힘을 합쳐 이룩한 값진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코리아타운 내 홈리스 셸터 설치 발표가 난 것과 비슷한 시기 LA 시 주민의회 담당국에는 코리아타운 지역인 윌셔 주민의회를 절반으로 잘라 방글라데시 주민 의회로 만들겠다는 안이 올라왔다. 이 안이 주민 투표를 거쳐 확정될 경우 60년대부터 한인들이 피땀으로 가꿔온 LA 한인 타운은 반쪽이 날 판이었다.

처음에는 비관론이 우세했다. 한인들은 투표 참여율이 낮기로 유명한데다 이 안이 투표로 부쳐진다는 사실도 늦게 알려져 대비할 시간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미연합회 등 1.5세들은 밤늦도록 자원 봉사를 하며 투표의 필요성을 알리고 유권자 등록을 돕는가 하면 일부 한인들은 성금을 자진해서 기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6월 19일 막상 투표를 한 후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총 1만9,126표의 유효표 가운데 반대가 98.5%인 1만8,844명이고 찬성은 1.5%인 282표에 불과했다. 한인들의 결집된 힘을 이처럼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없었다. 웨슨 의장이 마음을 바꿔 홈리스 셸터를 타운 밖으로 옮긴 것도 이런 한인들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미 건국의 이유를 천명한 ‘독립 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중에는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권이 포함돼 있다. 이런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가 창설되었고 그 권력의 정당성은 피치자의 동의에 기초한다…어떤 정부라도 이런 목적을 파괴하려 할 때 이를 바꾸거나 폐지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다”라고 적혀 있다. 아무리 합법적인 것 같은 법도 국민의 동의가 없는 것은 무효고 그렇게 만드는 것은 국민의 권리다.

2018년 한인들은 단합된 힘으로 시정부의 잘못된 결정을 뒤집고 삶의 터전인 코리아타운을 지켜냈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지만 올해는 한인 이민사의 새 이정표를 쓴 해로 기록되어도 좋을 듯하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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