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광장’ 과 백발

2018-08-03 (금)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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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소설 ‘광장’ 의 작가 최인훈이 지난달 24일 오전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주인공 이명준이 6.25 전쟁 포로 송환지로 남과 북을 거부하고 제3국으로 가는 배 타고르 호를 탔으나 바다로 투신하는 이 소설은 남북한 분단현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이념, 지식인의 고뇌 등을 보여준다.

한국 청년 치고 이 소설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현재 정치권뿐만 아니라 한국민은 물론 재외동포까지도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있는 현실을 걱정하는 이들은 다시 한 번 읽어볼 만하다.


최인훈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 6.25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월남하는 등 남북 분단 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해석되는 소설 속 인물 ‘이명준’을 낳았다. 1977년부터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창과 교수로 재직하여 2001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4년간 수많은 문인 제자를 배출하면서 1994년 장편 ‘화두’ 등 글도 꾸준히 써왔다.

최인훈은 지난 3월부터 암으로 투병하며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중에도 남북 정상회담 소식을 잠깐씩 들었다고 하니 평생에 걸친 남북통일의 염원이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았을까.

한국 정치계는 요즘 어지럽다. 새로 당선된 도지사와 시장은 조폭 연관설에 휩싸였고 한 정당의 대표는 순간의 실수로 평생 일군 것을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4월27일 남북정상회담, 5월26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등 역사적인 일들이 이어졌지만 남북 간 변화나 성취된 것이 아직 별로 없다. 경제성장, 국력 강화 등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1,700만 개의 촛불로 탄생시킨 정부 지도자들은 시간은 흐르는데 되는 일이 없다면,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맨 정신이 아니어야 한다. 한국 TV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을 보면 대부분 이발소에서 갓 나온 것처럼 말끔하고 머리도 새까맣게 반들거린다. 요즘 같은 시기에 하룻밤 새 백발이 되어버린 정치인은 왜 없을까?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란 것이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전날 금발머리가 백발로 변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공주로 태어나 프랑스로 시집와서 패션, 사교, 여흥을 즐기다 국고낭비와 반역죄로 두 달간 감옥에 있으며 얼마나 겁나고 공포스러웠을까? 그래서 하룻밤 새 백발이 되었나보다.

‘유토피아’의 작가 토머스 모어는 헨리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 역시 사형 전날에 머리가 백발로 변했는가 하면 무굴 제국 황제 샤 자한은 사랑했던 뭄타르 마한이 사망하자 슬픔으로 머리가 백발로 변했다.


동양에서는 춘추시대 오자서(伍子胥)가 간신 백비의 모함에 초나라를 탈출하여 오나라로 가는 과정에서 분노와 복수심, 피살의 두려움으로 하루밤새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춘추’는 기록한다.

앨라배마 주립대와 버밍엄대 공동연구진은 슬픔, 공포, 분노, 극심한 스트레스는 모발의 멜라닌 색소 생성을 방해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었다.

피의자들 중 하룻밤 새 흑발이 백발로 변했다는 사람이 있으면 나름 죄의식이 있거나 본인이 억울하다는 거겠지 싶어 동정표가 갈 것 같다. 반질거리는 흑발보다는 백발이 봐줄만 하다.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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