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제사회 관심 떨어지고 평화유지군 예산 부족, 철수시 분쟁악화 불보듯

2018-07-16 (월) 김광수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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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단 다르푸르 길등···남쪽 아프리카계 지역으로, 북쪽 아랍계가 몰려오며 갈등

▶ 평화유지군 활동 여전히 더디고, 30여년 독재 대통령도 걸림돌

국제사회 관심 떨어지고 평화유지군 예산 부족, 철수시 분쟁악화 불보듯

사막화가 심각하게 진행 중인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 지역.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제사회 관심 떨어지고 평화유지군 예산 부족, 철수시 분쟁악화 불보듯

수단인민해방군 소속 병사들이 지난 2006년 평화협정 문제를 유엔 측과 논의하기 위해 다르푸르 알파시르 서부에 위치한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AP]


아프리카 수단의 내전은 북부의 중앙 집권적인 아랍계 이슬람 정부와 남부의 자치를 주장하는 아프리카계 기독교도 사이에 발생했다.정치 권력의 주도권,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종교적 분쟁, 아랍계와 아프리카계의 대립, 북부와 남부의 지역 간 갈등, 석유자원에 대한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다.

남북이 이질화되기 시작한 건 1820년 이집트가 금과 노예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수단을 침략, 북부 수단을 이용해 남부 수단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면서부터다. 1881년 마흐디가 이끄는 무슬림이 봉기해 이집트의 지배를 몰아냈으나, 다음해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다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후 영국의 선교사들은 수단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에 남부는 기독교도가 늘면서 북부와 더욱 큰 차이를 보이게 됐다.

수단 내전은 독립 이전인 1955년부터 북부와 남부 사이에 불평등과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남부 수단은 남부수단해방운동(SSLM)을 조직하고 정부에 대해 자치를 주장하며 저항했다. 결국 당사자들이 1972년 ‘아디스아바바 협정’을 통해 휴전에 합의하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보장받은 뒤 내전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983년 엘 니메이리 대통령은 아디스아바바 협정을 파기했다. 남부와 북부 경계지역에서 발견된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샤리아 이슬람 법을 제정해 이슬람 국가를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로 인해 1983년부터 2005년까지 약 21년간 내전이 발생했으며, 약 200만명이 사망하고 4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극도의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남부 기독교계 흑인들은 수단인민해방운동군(SPLM)을 조직해 수단 남부의 자치를 위해 정부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1985년 쿠데타가 발생해 엘 니메이리 대통령이 실각했고, 다음해 4월 선거를 통해 알 마흐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알 마흐디 정부는 SPLM과의 평화협상을 통해 샤리아 법 적용을 폐지하고 헌정회의를 소집하는 내용을 담은 ‘코카담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정부의 평화정착 노력은 악화된 경제로 인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1989년 알 바시르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2005년 합의된 포괄적 평화협정이 이행돼 2011년 남수단이 국민투표를 통해 분리 독립을 하게 되면서 수단 내전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단의 내전은 북부와 남부와의 갈등뿐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수단 서부 다르푸르(Darfur) 지역의 분쟁도 포함시켜 설명해야 한다. 이 지역에 정착한 아프리카계 종족인 중부의 퍼르(Fur)족과 서부의 마살리트(Masalit)족은 기장을 재배하는 농경 부족인 반면, 북부의 자그하와(Zaghawa)족은 낙타와 염소를 방목한다. 아랍계인 남동부의 바가라(Baggara)족은 소를 방목하고 있다. 다이푸르 지역 주민들은 인종적 차이를 떠나서 같은 수니파 무슬림이다. 인종 구분은 오랜 기간 혼종이 발생해 피부색과 외형으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이 지역의 분쟁은 환경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다르푸르 북부지역의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돼 아랍계 유목민들이 초지와 물을 찾아 남진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또한 독립 당시 약 133만명이던 인구가 2004년 약 600만명으로, 그리고 지난해에는 약 930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해 생활환경이 악화됐고 1984~1985년 발생한 대기근은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수단 정부의 무능과 편파적인 정책은 이 지역 주민들을 분열시키면서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아프리카계 종족은 다르푸르 지역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북쪽 아랍계 유목민이 가뭄과 사막화로 자신들의 지역을 자주 침범하는데 대해 정부에 대책을 요구했으나 이슬람 정서가 강한 중앙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결정적으로는 1994년 수단 정부가 이 지역을 3개의 주로 분리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계 부족의 경작지를 축소시키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수단 분쟁은 강대국의 직접적 이익이 걸려 있지 않고 그 영향이 국내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국제사회로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 국제사회는 2007년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약 30만명이 사망했고 약 25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아프리카연합(AU)은 남부 수단이 협정을 통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식민지 시기에 결정된 국경문제를 유연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다르푸르에 대한 AU 주도의 평화유지군 파병은 소말리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자적인 평화해결을 지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르푸르의 평화유지활동은 답답하게 진행되고 있다. AU와 유엔 주도로 다르푸르 평화협정(DPA)이 2006년 5월 5일에 체결되고, 2010년 6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추가 협상이 재개돼 평화협정 문서가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당사자들이 있다. 다른 반군조직은 수단 정부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17년 7월 수단인민해방군과 정의평등운동에서 분리돼 결성된 세 번째 파벌인 수단자유동맹군(SLFA)은 다르푸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차드의 평화노력에 참여하고 있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다르푸르 사태가 빠른 시일 안에 효과적으로 종식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가 몇 가지 있다. 2018년 6월 현재 다르푸르의 분쟁지역에 파병된 평화유지군의 일부가 분쟁 해결 여부에 관계없이 예산 삭감으로 인해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평화유지군이 철수하면 다르푸르 지역의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현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과 30년이 넘는 독재는 큰 문제다. 2009년 국제형사재판소는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혐의로 현직 대통령인 알 바쉬르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태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수단의 정치적 민주화가 내전 종식을 이끌어 내는데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광수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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