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몬티첼로

2018-07-05 (목) 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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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티첼로

남선우 변호사

내가 메릴랜드에 살게 된 지가 올해로 만 40년이다. 우리 집에서 토마스 제퍼슨의 몬티첼로 저택 겸 묘지가 있는 버지니아 샬롯츠빌까지는 불과 123마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개인주택으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그 곳을 가보지 않은 가장 큰 마음속의 이유는 제퍼슨의 이중성 또는 위선 때문일 듯하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시작되는 미국독립선언서의 저자인 제퍼슨은 정말로 다재다능했었기에 르네상스 맨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 버지니아 주의원 시절부터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저자였고, 미국 독립의 국부들 중 정치이론으로 족적을 굳혔기에 워싱턴 그리고 존 아담스 다음으로 제 3대 대통령에 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퍼슨의 이중성은 무엇이었던가? 보스턴 출신 아담스와는 달리 제퍼슨이 흑인 노예들의 주인이었다는 것은 당시 관행 탓이라 해도 자유평등사상을 유창하게 전개시킨 사상가로서는 너무나도 위선적이었다. 살아생전 도합 607명의 노예들을 부려먹었던 제퍼슨은 어떤 노예 소유자들이 임종 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상당수의 노예들을 자유민들로 만들고 참회를 나타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딱 다섯 노예들만 해방시킨 옹졸한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황혼의 샐리’라 불리던 흑백 혼혈여인이었던 샐리 헤밍스와의 관계에 이르러서는 제퍼슨의 위선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토마스 제퍼슨이 결혼했을 때 장인이 보내준 선물 가운데 하나였던 샐리 헤밍스는 자기 어머니의 성씨를 따 헤밍스라 불렸다.

미국 독립 후 아담스 대통령을 지지하던 정파와 제퍼슨을 지지하던 세력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각파의 신문들을 통해 전개했다. 반 제퍼슨 쪽 신문들은 한때는 제퍼슨의 지지자였다가 논공행상에서 괄시를 받았다고 해서 변심한 언론인을 고용해 제퍼슨과 샐리 헤밍스 사이에 아이들이 여섯이나 된다고 폭로한 바 있다. 제퍼슨 자신은 시인도 부인도 안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샐리 헤밍스의 아들 매디슨 헤밍스는 자기가 토마스 제퍼슨의 아들이었다고 1873년 신문에 밝혔다. DNA를 통한 족보연구와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결론이 가능해진 1990년대부터 샐리 헤밍스는 사실상 제퍼슨의 부인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제퍼슨의 부인이 일찍 죽은 후 제퍼슨이 프랑스 공사로 파리에 머무르던 때부터 시작해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도합 여섯명의 자녀들이 탄생한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제퍼슨이 임종 때 자유를 준 다섯명의 노예들은 다 헤밍스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의미에서는 미국 제 3대 퍼스트레이디였던 샐리 헤밍스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도 상당히 미묘한 일이다. 샐리 헤밍스는 제퍼슨의 딸이 나중에 가서야 자유민으로 해방시켰다.

건축을 배운 바 없는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의원 시절부터 유산으로 받은 몬티첼로를 설계하고 짓기 시작한다. 대통령 직을 끝내고 귀향한 그는 버지니아주립대학을 몬티첼로 부근에 손수 설계한다. 그는 죽기 전에 자기 비명을 이렇게 새기도록 유언했다. “이 자리에 미국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주 종교자유법의 저자,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이 묻혀있노라.”

그가 국무장관, 부통령, 그리고 3대 대통령이란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았을 정도로 몬티첼로와 버지니아대학을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약 2주전 몬티첼로에는 본관 바로 옆에 있는, 농장 노예들과는 달리 주인과 주인의 식구들을 24시간 365일 섬겼던 ‘집안 노예들’의 별관자리가 새 단장을 하고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는 보도이다. 그 중 천정이 낮고 유리창 하나도 없는 방이 샐리 헤밍스의 방으로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자신의 자식들을 팔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선인이나 의인은 결코 아니다. 최고의 지성인, 사상가, 정치인, 문필가, 건축가였지만 죄인 중의 죄인임에 틀림없다. 언제 한번 몬티첼로를 들러보아야겠다.

<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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