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지막 3김’

2018-06-2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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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월 23일 새벽 가말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 장교단’은 탱크와 장갑차로 이집트의 정부 청사와 군 사령부를 무혈 접수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무능한 왕정에 지치고 분노하던 이집트 국민들은 이를 뜨겁게 지지했다.

권력을 쟁취하는데 성공한 나세르는 1차 중동 전쟁의 영웅으로 국민의 추앙을 받던 나기브를 초대 대통령 겸 총리로 앉히고 자신은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혁명이 자리 잡자 곧 나세르는 나기브를 가택에 연금하고 모든 공직에서 쫓아낸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 군은 탱크와 장갑차로 대한민국의 정부 청사와 군 사령부를 무혈 접수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무능한 장면 정부에 지치고 분노하던 한국 국민들은 이를 뜨겁게 지지했다.


권력을 쟁취하는데 성공한 박정희는 군 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을 군사혁명위 의장과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앉히고 자신은 부의장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혁명이 자리 잡자 그를 해임하고 ‘반혁명’ 혐의로 기소한다.

이 두 사건이 비슷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5.16 주역들이 모델로 삼은 것이 나세르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설계한 것은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종필이다. 박정희와 함께 군에서 근무하며 그 형의 딸 박영옥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김종필은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다.

박영옥은 박정희에게 각별한 조카였다. 그의 아버지 박상희는 박정희의 띠 동갑 형으로 일제시대에 동아일보 구미지국장을 역 임한 엘리트 사회주의자였다. 1946년 10월 대구 폭동 때 경찰서 습격에 앞장서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인물로 박정희가 한 때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것은 그 영향이 컸다.

김종필이 혁명 공약을 만들면서 1조에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로 쓴 것은 박정희의 사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박정희도 이를 보고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5.16 쿠데타 성공에 박정희를 제외하고 김종필 만큼 기여를 한 인물은 없다. 쿠데타 기획에서 혁명 공약에 이르기까지, 초대 중정부장으로 취임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4대 부정 사건을 일으켜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데까지 박정희 집권을 위한 악역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그는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면서도 박정희 집권 내내 견제 당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그 노하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종필이 늘 잠재적 도전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79년 박정희가 죽고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찾아온 노태우를 보고 2인자의 어려움을 말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1인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명문가 7남 중 5남으로 태어난 김종필은 어려서는 유복한 삶을 보냈으나 아버지 사망과 함께 가세가 기울자 대전사범학교에 진학해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나 곧 입대해 군인의 길을 간다.

5.16 성공 후 명실상부한 2인자로 살던 그는 박정희 사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정계를 은퇴하지만 1987년 민주 항쟁으로 정계에 복귀하며 1990년 3당 합당을 주도하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2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당내 군부 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의 불화로 민자당을 탈당하며 자민련을 창당, 독자 세력을 키운다. 그 후 1997년 대선에서 자신의 정적이자 노선이 다른 김대중과 DJP연합을 성사시켜 김대중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2인자 자리를 굳힌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등을 둘러싼 의견 충돌로 DJP연합은 붕괴되며 2004년 노무현 탄핵에 찬성했다 역풍을 맞아 국회의원 자리를 잃게 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마지막 3김’이자 ‘영원한 2인자’였던 김종필이 지난 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쿠데타와 정치 탄압, 부정부패의 상징인 그에 대한 현 집권 여당의 평가는 의외로 부드럽다. 문재인 정부는 그에게 최고 등급의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적폐 청산 1호로 꼽힐 인물에게 이런 후한 대접을 한 것은 DJP연합으로 김대중 당선에 공을 세운 결과일 것이다.

그의 어록 중 자신이 묘비명으로 쓴 “90에 생각해 보니 89세까지가 모두 헛된 인생”이란 구절과 “정치는 허업”이란 말이 눈길을 끈다. 덧없는 정치에 목을 매고 발버둥치는 수많은 군상들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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