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로마인들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

2018-06-25 (월)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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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교훈?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지난 며칠간 이런저런 이유로 이 글만은 꼭 써야한다는 충동에 떠밀려 여러 편의 칼럼을 썼다.

바로 전에 무역전쟁에 관한 장문의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시사문제와 관련해 로마의 역사에 관한 글을 꼭 쓰고 싶었다.

맞다. 그건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고대 역사, 특히 로마사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찾으려드는 사람은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일단 얼간이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세실 B. 데밀 감독의 영화 줄거리를 되새김질해가며 사치와 방탕이 로마공화정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니얼 퍼거슨을 향해 퍼부은 브래드 드롱의 따끔한 지적은 정당하다. 퍼거슨은 실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인용한 통계치가 잘못된 것이며 그가 인용한 로마의 인플레는 10%였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그러나 난 공화정의 몰락이 아니라 그 이후 아우구스투스를 필두로 2세기 이상 안정을 유지했던 팍스 로마나를 생각한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그 시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 나간 행동인지 모르지만 난 그 교훈을 찾아내 드러내 보이려 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로마제국와 현대사회와의 관련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은 에드워드 기번 같은 근대 유럽인들을 매료시켰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잣대를 적용하면 믿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고, 공유할만한 현대적 가치도 거의 없는 산업혁명 이전 사회(pre-industrial society)에 불과했다.

로마 제국이 산업혁명 이전의 다른 제국들에 비해 크고, 오래 지속된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여가를 틈타 상당량의 관련서적을 탐독한 결과 나는 현대의 학자들이 로마를 어딘지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피터 테민으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카일 하퍼로부터 로마가 그저 평범한 산업혁명 이전 경제주체 국가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기술적 비약은 없었지만 징기간 지속된 평화와 활발한 지역간 교역 및 세련된 비즈니스와 금융시스템을 바탕으로 놀라운 생산성을 보였던 로마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은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 이전에는 견줄만한 짝이 없었다.

하퍼는 로마가 질병과 배종설(germ theory)이 결여된 사회로서는 도저히 완화시킬 수 없었던 도시화와 무역의 부산물로 인해 상당한 제재를 당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경제적인 면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성취를 보였다. 로마인들은 그리 선량하지 않았다. 토가를 떨쳐입은 에드워드 시대의 신사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 없이 노예를 부렸고, 서슴없이 잔인했으며 황제의 지배에 대한 도전을 진입하는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극단적인 무력을 사용했다.

이처럼 폭력의 위협이 상존했지만 그렇다고 로마제국이 공포정치 때문에 유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팍스 로마나는 대부분 지방 엘리트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해 지탱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비결은 로마가 실제로 상당히 많은 소프트 파워를 동원했다는데 있다.

지방 엘리트들에게는 로마식 가치를 지닌 근사한 삶이 제공되었고 황제체제는 중앙정계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야심만만한 지방인들을 위한 등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번창한 상호의존적인 경제는 로마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로마 체제에 동화된 사람들에게 보상을 안겨주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로마는 탐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기적인 시스템 구축을 위한 근시안적인 권력의 남용을 제한함으로써 번영을 구가했다.

목이 뻣뻣한 나의 조상들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동화되기를 거부했기에 분명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했듯 로마인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악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팍스 로마나의 정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도 어디선가 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자제(restraint)와 많은 신민들에게 어필하는 일련의 가치는 유례없는 평화와 번영의 장기화를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자, 이제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 아마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3세대 동안 지속된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일컫는 팍스 아메리카나는 세부적인 면에서 로마제국 초기의 원수 정치(Roman Principate)와는 완연히 다르다.

우리는 로마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부유할 뿐 아니라 훨씬 선량하다: 미국은 끔찍하고 수치스런 일들을 저질렀지만 로마인들이 열을 받았을 때 거침없이 행했던 것과 같은 참담한 짓은 하지 않았다.

로마처럼 우리의 제국도 폭력이 아니라 주로 소프트 파워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미국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지배세력이 되었을 때조차 스스로 자제했고, 우방국들에게 우리의 시스템을 날 것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다.

이런 방식은 제대로 먹혔다. 물론 완전하진 않았지만 세계와 미국은 그 이전의 30년 전쟁 시기에 견주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유한 시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제 야만적인 침략으로 이 모든것이 무너질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쉽게도 미국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들 가치를 거부하는 야만인은 문 앞이 아니라 이미 문 안에, 그것도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 있다.

왜냐하면 이 야만인은 국내에서 자생한 자이기 때문이다.(물론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지만 말이다.)

이건 무시무시한 괴담이다. 우리는 무언가 근사한 것을 만들어 놓은 뒤 변변한 이유조차 없이 그 모두를 던져버리려 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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