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사람 잡는 우울증

2018-06-21 (목)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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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울증 진단을 받은 한 지인이 몇 주째 교회에 안 나온다. 기도로 극복하겠다며 약을 외면한다고 들었는데 증세가 호전되지 않은 모양이다. 고희를 앞둔 그 권사는 ‘기도가 세기로’ 유명하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다. 평생 기도응답을 많이 경험했다고 간증했다. 하지만 그 권사는 우울증이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정신질환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지난주 명품 핸드백 디자이너 케이트 스페이드와 인기 셰프(요리사)이자 방송인인 앤소니 부르댕이 이틀 새 목매달아 자살해 전 세계적으로 톱뉴스가 됐다. 두 사람 모두 우울증이 원인이었다. 엊그제는 한인 재학생이 많은 시애틀 한 고등학교의 풋볼팀 주장선수 두 명이 역시 이틀 새 숨졌다. 한명은 자연사였지만 다른 한명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착 가라앉아 고독, 불안, 절망, 무기력, 패배의식에 짓눌린다. 사고와 판단을 관장하는 뇌의 전두엽과 충동, 수면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기능이 저하돼 있다. 따라서 의욕도, 식욕도, 집중력도 떨어지고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본인의 나약함과 관계가 없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기분상태도 아니다. 자기의 노력과 의지로 나아지지도 않는다.


우울증은 치매와 마찬가지로 공격대상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홈리스든 갑부든, 무명인이든 인기스타든 가리지 않는다. 세기의 섹시스타로 불린 매릴린 먼로, 희극배우 로빈 윌리엄스, 시애틀이 배출한 톱 가수 커트 코베인도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그랬고, 폭군 네로황제도, 미녀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그랬다.

물론 우울증 환자들이 모두 자살하지는 않는다. 자살을 시도하도록 유인하는 ‘촉매제’가 있다. 실연, 이혼, 질병, 실직, 사업실패 따위이다.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 중 자살을 한 차례라도 시도하는 사람은 시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6.5배나 많았다. 자살시도 경험자의 25.6%는 우울증 환자, 22.6%는 술이나 마약 남용자라고 밝힌 연구논문도 있다.

자살이 지구촌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워싱턴주에서만 한해 1,110여명이 자살한다. 지난 2016년 한해 미국인 4만5,00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9년보다 28% 늘어났다. 인구 10만명당 13.7명꼴이며 미국인들의 사망 원인 중 10번째를 차지한다. 이들 전체 자살자의 90% 이상이 우울증 등 검진 가능한 정신질환과 관련 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은 자고로 ‘자살 왕국’이다. 지난 2015년 한 해 1만3,513명이 자살했다. 하루 44명꼴이다.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이 28.7명으로 OECD(경제협력 개발기구)의 34개 회원국가 중 12년째 톱이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자살자 중 28.4%를 점유한다. 노인 10만명당 54.8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OECD의 3.2배, 미국인의 3.5배, 일본인의 2.3배다.

고령과 자살률은 정비례한다. 60대 중엔 10만명당 36.9명이지만 70대에선 62.5명, 80대에선 83.7명으로 수직 상승한다. 바야흐로 ‘인생 100세 시대’다.

특히 한국은 초 고령사회(65세 이상 노인이 전체인구의 20% 상회)에 2026년 진입할 것으로 예측된다. 건강, 고독, 빈곤, 자녀 부담감 등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하는 우울증 노인들이 더욱 늘어날 터이다.

“빨리 죽고 싶다”는 노인들 말이 공인된 거짓말로 통한 건 옛날이다. 이젠 예사로 지나칠 말이 아니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에게 의사의 진료가 필요한 정신문제가 있음을 믿으려하지 않고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을 탓하기 일쑤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정부기관의 대책은 부지하세월이다. 가족과 이웃들의 관심과 배려가 아직은 가장 좋은 처방이다.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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