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상 수상 노세웅 시인의 시들

2018-06-12 (화) 08:10:14 노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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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천사

일기 예보 그대로 새벽부터 함박눈이
공수부대 적진에 침투하듯 낙하산 타고 내려오네
교회 십자가 위에도
무서운 소식 가득 실은 조간 신문기사 위에도
눈이 쌓이네

먼 데서 온 손자 손녀 천사들
소복이 쌓인 눈 뭉쳐
날개 달린 천사들 만들어 놓고
눈보다 더 희게 동네 길도 치우네

이웃들도
눈사람에게 모자를 선물하고
목도리 둘러 주니
함박눈이 춤을 추며 지상에 내리네


훈훈한 장작불
겨울 아궁이 속 활- 활 타 오르니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듯하네


■땅끝 마을

황금 공주*의 배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면
땅끝 마을 우수아이아, 핀 델 문도*를 만난다.
킬리만자로처럼 분화구의 눈 위에
다시 함박눈 내리고 또 내려 빙하가 되었다.

빙하가 갈라지고 눈이 녹아 호수에 고인다.
호수에 사는 송어, 송어 요리를 먹으며
백설공주와 마주 앉아
세상을 음미하며 세상 끝을 바라본다.
바울을 만나고 예수를 만난다.
날마다 행복하게 살았다는 헬렌 켈러도 만나고
수령이나 먹을 수 있는 요리보다
더 좋은 요리를 대하며
하나님께 지은죄를
속죄한다.

중동 지역 죄 없는 아이들
전쟁에 시달리는 아이를 생각하면
인간은 악마다.
남은 음식을 바라보며 용서를 빈다.
땅끝 마을에 와 봐야 안다.
세상의 끝에서 보면 죄인이 된다.

*황금 공주: Golden Princess Cruise , *우수아이아, 핀델문도 (Usuaia, Fin del Mundo: 남미 최남단의 지명, 스페인어로 세상의 끝이라는 뜻).


■빚과 빛

친구지간도 아니고
사제지간도 아니고
형제지간도 아니고
모자지간도 아닌데
부자지간은 더더욱 아닌데

먼 이국땅
진눈깨비 내리는 아침 출근길
모두가 급하게 가는 아침

생면부지의 인간을
같은 민족끼리도 아니고
같은 피부색도 아닌데

급한 볼일이 있어서
늦겠다고 전화하면서
어디가 어떻게 고장인지 찾아 고쳐주고
이름도 성도 남겨 두지 않고 사라진 노신사

평생 잊지 못할 빚
내게 빛으로 남아있네

이름도
전화번호도 남겨두지 않고
떠난 신사

나는 지금도 내 자동차 안에
점퍼 케이불을 갖고 다닌다.
빚을 갚기 위하여

오, 찬란한 빛

<노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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