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한 불안정화 가능성 대비해야

2018-06-12 (화) 채수찬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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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불안정화 가능성 대비해야

채수찬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행보는 늘 예상보다 템포가 빠르다.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장성택을 제거하라고 했을 것이다. 장성택 처형은 예상보다 빨랐다. 김정일은 또 김정은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했을 것이다. 핵무기 보유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되 밀고 당기는 협상을 병행해 미국의 군사적 공격으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처럼 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북미 정상회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것은 협상 타결로 북한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전쟁 위협과 경제제재를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화에 나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템포가 너무 빠르다.

그동안 북한 정권의 존립 방식은 핵문제·경제문제 등을 한꺼번에 해결하지 않고 ‘끌고 가기’였다. 사실 미국과의 적대관계도 체제 유지의 한 축이었다. 빌 클린턴 정부 말기 미국의 평양사무소 설치를 위해 미 국무부 인력이 일본 도쿄에서 대기했다. 북한이 이들의 입국을 계속 미루다가 이들이 철수하게 되자 오히려 안도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요구해온 적대관계 해소가 막상 실현되려 하자 주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따르는 개방 압력에 대응할 자신이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정은이 핵무기 완성을 서둘러 선언해버림으로써 북한은 끌고 가기를 계속하기 힘들게 됐다. 그동안의 존립 방식을 스스로 허물어뜨린 셈이다. 북한은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호언하지만 전쟁할 능력이 없다. 경제제재에 오래 버틸 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존립 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개혁과 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으로 체제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그런데 북한에는 경제 발전을 위한 인적·제도적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 경제 발전을 추진하고 실행할 사람들이 없다. 지난 2000년대 초 필자가 고위 북한외교관에게 당시 김정일이 화두로 제시한 ‘새로운 사고’에 대한 견해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나는 그런 것 모른다”고 말했다. 어떻게 지도자의 말을 무시하는 불경한 말을 할 수 있는가. 김정일은 속임수에 능했다. 개혁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여기에 따라오는 개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가려내 체제불만 세력으로 몰아 숙청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고 보니 이제는 개혁을 한다고 해도 따라갈 사람이 없게 됐다.

또 북한에는 시장경제에 필요한 제도들이 갖춰져 있지 않다. 배급체계가 무너지고 장마당이 선다고 시장경제가 되지는 않는다. 시장경제는 상당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계약이 법적으로 존중되고 이행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바라는 것처럼 김 위원장이 핵무기를 버리고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이끌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기대의 근거를 찾기 힘들다. 김정은에게 그런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

준비가 덜 된 채로 변화의 압력에 노출된 북한 체제가 불안정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대내적으로 핵무기 대신 경제 성장으로 체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보면 남북·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은 상대방의 기를 제압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수단 하나를 잃게 된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열세인 북한의 큰 지렛대는 북한 지도자가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므로 자폭 테러식 공격도 감행할 수 있다는 위협이었다. 북한 지도자가 합리적인 대화상대로 인정되면 이 지렛대가 사라지고 북한의 적나라한 실체만 남는다.

준비되지 않은 급격한 변화에는 혼란이 따르기 마련이다. 파국적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낙관적 시나리오만 펼칠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싫은 시나리오도 생각해야 한다. 물론 혼란이 두려워 변화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불연속적인 역사적 변화는 어차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채수찬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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