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가베 없는 첫 민주선거... 독재 후유증 청산은 누구 손에

2018-05-25 (금)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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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전쟁 영웅 여당 음난가그와, 경제 발전 위해 영연방 재가입 추진

▶ 인권변호사 출신 야당 차미사, 적폐 청산 적임자 자처… 표심 공략

무가베 없는 첫 민주선거... 독재 후유증 청산은 누구 손에

짐바브웨를 37년간 통치한 로버트 무가베(왼쪽) 전 대통령과 무가베의 권력을 물려받으려 했던 그의 부인 그레이스. [AP]

무가베 없는 첫 민주선거... 독재 후유증 청산은 누구 손에

짐바브웨 7월중 총선ㆍ대선

지난해 11월 신(神)만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던 지구상 최장기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93)가 군부에 의해 축출된 짐바브웨.

짐바브웨가 올해 38년 만에 무가베 없는 전국 선거를 치른다.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치르는 민주적 선거다. 공식 선거일자는 공표되지 않았지만 7월 중 대선과 국회의원 총선거가 열릴 예정이다. 이번 선거의 과제는 장기 독재 후유증으로 황폐해진 짐바브웨의 재건이다. 특권층인 군부와 엘리트 계층의 부패를 근절하고, 투명하고 민주적인 정권이양(교체)을 실현해 민주주의를 정초(定礎)하는 것이다. 지난해 무가베 전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에머슨 음난가그와(75) 대통령에 인권 변호사 출신 야당 지도자 넬슨 차미사(40)가 도전하는 형국이다.


공정선거 공언한 음난가그와

여당인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 소속인 음난가그와 대통령에게 이번 대선은 임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다. 그는 지난해말 무가베 전 대통령의 부인 그레이스와의 파벌싸움 끝에 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망명했다가 무가베가 물러나자 군부 후원으로 대권을 넘겨 받았다. 독립전쟁 영웅 중 한 명이지만 무가베 통치기간인 1980년대초 비밀경찰중앙정보기구(CIO)를 이끌며 인권탄압을 일삼는 등 무가베의 수족 노릇을 했다. ‘라코스테(악어)’라는 별명이 상징하듯 노회한 생존전략으로 권력투쟁에 휘말리지 않고 포스트 무가베 자리를 노려오다 대권을 움켜쥐었다.

‘무가베를 대신하는 또다른 독재자가 될 것’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그는 올해 초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을 “공정하며 자유롭고 신뢰있는 선거로 치르겠다”고 공언했다. 이어“유럽연합(EU)이건 유엔이건 누구라도 와서 선거를 감시해도 좋다”고도 했다. 짐바브웨는 무가베 통치 시기 야당 후보의 선거운동원을 탄압ㆍ살해하고,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의 인권침해 전력으로 2002년부터 EU의 금융ㆍ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공정한 선거 이행은 1인당 국민소득이 1,200달러 남짓한 빈국 짐바브웨의 경제재건 계획과도 맞물려 있다.

무가베 집권기 짐바브웨는 EU의 경제제재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자본을 유치하는 이른바 동방정책(Look East)을 표방했다. 하지만 음난가그와 대통령은 기존의 동방정책에 서방 자본까지 끌어들이겠다는 서방 재교류정책(Re-engagement West)을 병행하겠다고 나섰다. 특히 옛 식민종주국인 영국을 매개로 경제제재 탈피를 꾀하고 있다. 그는 인권침해 혐의로 탈퇴당했던 영연방 재가입을 15년 만에 추진하고 있는데, 영연방 측도 공정한 선거가 치러진다면 짐바브웨의 재가입을 허용할 방침이다. 영연방 재가입을 통해 인권후진국가의 낙인을 벗은 뒤 경제재건을 꾀하겠다는 게 음난가그와 대통령 측의 전략인 셈이다.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부채(90억달러)를 축소하고, 고질적인 유동성 위기를 극복해 역내 최대 부국이었던 영국 식민지 시기에 맞먹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지지도 견고한 편이다.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던 짐바브웨 정치현안 토론회에 참석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폴 케년은 “음난가그와는 세계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어 과거처럼 선거조작은 못할 것”이라면서 “야당 세력이 결집할 시간이 충분치 않아 그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내다봤다. 변수는 물러난 무가베 전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 3월 인터뷰에서 자신이 쿠데타로 물러났다며 신당 지지계획을 내비치면서 정치 참여 가능성을 시사했다. 핀란드 헬싱키대의 짐바브웨 연구자인 오버트 호지는 “대선에서 여당 표를 분산시켜 음난가그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게 무가베의 생각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차미사 후보 적폐청산 자임

음난가그와 대통령을 위협할 유력한 도전자는 인권 변호사이자 지난해 제1야당인 민주변혁을 위한 운동(MDC) 대표로 취임한 넬슨 차미사(40)다. MDC는 2005년 반(反) 무가베 기조로 창당해 도시지역ㆍ청년ㆍ여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족주의 중도좌파 정당. 카미사는 MDC 청년조직 대표를 시작으로 28세에 MDC 대변인에 발탁되는 등 일찍부터 정치지도자 훈련을 받았다. 촉망받는 야당 정치인이었던만큼 무가베 정권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고 2007년 공항에서 정보기관 요원들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가베 정권이 야당과 연정을 하던 2009~2013년 정보통신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공직경험도 쌓았다. 당시 무가베 대통령이 전기통신분야를 교통부처로 이관하려 하자 “무가베, 당신은 권한이 없다”고 반발하면서 국민들에게 강직한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차미사는 무가베 통치시기의 적폐를 청산할 적임자를 자임하며 표심을 공략하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은 “음난가그와 대통령이나 ZANU-PF의 변혁을 기대하느니 여성이 남성을 임신시킬 수 있다는 말을 믿겠다”면서 차미사만이 새 시대에 걸맞는 ‘신질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패척결, 교통망 개선, 초고속열차 도입 등의 공약을 내놓고 있지만 눈에 띄는 부분은 노골적인 반중(反中) 캠페인이다.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는 여당과 비슷하지만 그는 짐바브웨에 진출한 중국자본을 비난하면서 친중파인 음난가그와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다. BBC 방송에 따르면 차미사는 최근 선거유세에서 “현 정권이 중국과 체결한 투자계약들은 국부 유출을 가속화할 것”이라면서 “대통령에 취임한다면 중국과 맺은 계약들을 파기하고 중국자본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개혁정치가의 이미지를 선점하고 있지만 약점도 뚜렷하다. 고질적인 당내 분파주의 때문에 반(反) 음난가그와 동력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게 문제다. 당 대표를 두고 경쟁했던 토코자니 쿠페와 당명 및 당 상징 사용권을 놓고 법적 분쟁을 벌이는 등 분란이 격화하면서 자칫하면 적전분열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인권변호사인 이레느 패트라스는 “야당이 승리하려면 무조건 단결해야 하고 야당에 관심을 보이는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올 수 있도록 조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찰스 무투마 민주주의를 위한 짐바브웨 디아스포라 감독은 “현직에 유리하도록 돼 있는 선거제도도 야당에게 불리할 수 있다”면서 “사법개혁ㆍ안보개혁ㆍ선거개혁 등의 이슈를 총력을 다해 공론화해야 표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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