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약사들에게 토 달지 말라

2018-05-21 (월)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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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사들에게 토 달지 말라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지난주 우리는 스위스의 제약사인 노바티스가 도널드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인 마이클 코헨에게 120만 달러의 자문료를 지불한 후 그와 한 차례 면담을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트럼프는 ‘약값 인하 플랜’을 발표했다.

여기서 굳이 불필요한 인용부호를 사용한 것은 말만 ‘플랜’이지 알맹이가 거의 없는, 통제된 내용이거나, 혹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안에는 전문가들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 모두가 극히 주변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2016년 대선 캠페인에서 트럼프는 약값 인하를 위해 처방약값을 지불하는 메디케어의 역할을 비롯, 정부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금요일 연설에는 이 부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만약 트럼프가 제약회사들을 상대로 강력한 액션을 취할 것이라고 누군가 당신이 귀에 대고 소곤댄다면 이렇게 대답하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트럼프의 연설 이후 제약회사 주가가 치솟았어야 했다고.

이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현 시점에서 “트럼프가 대중주의를 표방하며 내놓았던 또 하나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헤드라인은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것처럼 뉴스가치 조차 없는 너무도 뻔한 얘기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묵직한 질문이 나온다.

첫째는 트럼프가 하겠다고 해놓고 하지 않은 일을 미국 정부가 앞장서서 실행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왜 약값에 관해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걸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확실한 예스다. 미국은 꼭 그래야할 이유도 없으면서 다른 주요 국가들에 비해 약값으로 훨씬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기본적으로 제약사들에게 우리는 막판까지 남아 있는 ‘봉’이다.

제약업의 비즈니스 방식은 경제학의 기초로 자유 시장 신봉자들이 떠받드는 수요와 공급 법칙과 전혀 관계가 없다. 대신 우리는 신약을 개발한 기업에게 한시적 법적 독점권을 인정하는 특허시스템을 갖고 있다. 혁신과 개발에 보상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같은 제도는 문제가 없거나, 최소한 두둔이 가능하다.

그러나 특허를 취득한 제약사가 독점권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허용하는 특허제도의 논리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

사실 제약사들이 부과하는 약값과 특허권을 전반적으로 제한하려는 정부의 조치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리고 납세자들이 약품관련 경비의 많은 부분을 지불한다는 사실은 약값 제한의 당위성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이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상당한 한 지렛대를 제공한다.

물론 약값에 대한 시시콜콜한 통제는 신약개발 의지를 꺾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게다가 온건한 제한 조치에 따른 베니핏은 거의 틀림없이 경비를 앞지를 것이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제약사들의 약품 개당 이윤은 줄어들겠지만 판매는 늘어날 것이고, 기존약품과 유사한 제품을 개발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등등의 이유에서다.

그것 외의 다른 이유도 있다. 제약사들과의 약값 흥정을 꺼리는 미국의 독특한 특성은 기본적으로 세계 나머지 국가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이것이야말로 트럼프가 싫어하는 일 아닐까?

그렇다면 정부는 왜 약값 인하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걸까?

단지 메디케어에 가격협상권을 부여하는 것 자체로는 큰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래도 지나치게 가격이 비싼 약에 대한 보험커버 거부권을 비롯, 메디케어에 일부 협상권을 주어야 한다. 이를 단순히 ‘배급제’라고 매도하기 전에 2003년 이전까지 메디케어가 약값을 전혀 지불하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기억해야 한다.

그래도 메디케어 보험적용 거부는 일부 수혜자들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전체의 92%가 약값 인하를 위해 메디케어에 협상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효과적인 협상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아마도 지지 열기는 수그러들 것이다.

그러나 세부사안에 대한 논의가 약값 인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메디케어를 통해 약값을 낮출 단계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치졸하다. 제약사들이 그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봉쇄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수의 정치인들을 매수했기 때문이다. 단지 선거기금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제약사들을 거들어주는 대가로 개인적으로 치부하는 정치인들이 수두룩하다.

결과적으로 납세자들에게 노인들의 처방약 경비를 부담하게 하면서도 메디케어의 가격 협상권을 구체적으로 봉쇄하는 내용의 2003 메디케어 현대화안을 짜맞춘 장본인이 누구인가?

정답은 당시 루이지애나 출신의 공화당 하원의원이었던 빌리 토진이었다. 토진은 법안을 통과시킨 후 의회를 떠나 제약업계의 대표적 이익단체인 미국제약협회(PhRMA)의 사장으로 변신해 고액의 연봉을 받고 있다.

지나치게 치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건 실제로 그의 행동이 지나치게 치졸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늪의 썩은 물을 밖으로 퍼내기는커녕 행정부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첫 번째 보건복지부장관인 탐 프라이스는 공금을 사적인 여행경비로 사용하다 도중하차했다. 그러나 공금유용보다는 제약업계와 관련된 이익상충이 실질적으로 훨씬 더 큰 이슈였다.

그의 후임자인 알렉스 아자르는 제약회사 경영자출신으로, 약값 책정에 대한 그의 명시적 견해는 선거전 당시 트럼프가 약속했던 것과 완전히 어긋난다.

이렇게 보면 미국 예외주의가 또 다시 우세승을 거두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직까지도 제약사들 마음대로 약값을 정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유일한 선진 국가이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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