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국어는 하나

2018-05-12 (토)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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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선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우째, 이런 일이...전세계의 수상권에 들만한 수많은 작가들, 작가로서 잠재적 능력을 지닌 어마어마한 숫자의 문학 소년소녀들, 그리고 발표와 동시에 밤을 새워 출판하여 대목을 볼 출판인쇄업자들...이들은 어쩌라고!

최근 미투(Me Too) 파문에 대한 미온적 대처로 논란에 휘말린 스웨덴 한림원이 4일 성명을 내고 올해 노벨문학상을 시상하지 않고 내년으로 연기한다고 했다. 지난 해 11월 한림원 종신위원 18명 중 한명인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의 남편 프랑스계 사진작가 장 클로드 아르노가 행한 성폭력 폭로, 노벨상 수상자 명단 사전 유출 혐의 등으로 한림원 종신 사무총장과 프로스텐손이 사퇴, 현재 한림원의 신뢰 회복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지난 4월19일부터 22일까지 맨하탄 딕슨 플레이스에서 제14회 펜 월드 보이스 축제(PEN World Voices Festival)가 열렸다. 전세 계 50개국 165명 이상의 작가가 초청됐으며 주제는 ‘저항하고 다시 상상하다’였다. 한국의 대 작가 황석영이 초청작가로 19일 ‘울어라, 사랑하는 조국이여’, 20일 ‘이루지 못한 삶’을 주제로 강연했다.


황석영은 “2차 대전이후 산업화와 근대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한국뿐이다. 독재 사회아래 자본주의는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경쟁을 했고 근대화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으나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데는 미숙했다”고 말했다.

강단에 선 작가들은 “군인들이여 우리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우리 형제들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글쓰기는 투쟁이다” 등등..., 독재 치하의 어둡고 암울한 시기를 저항하고 상처 입으며 지나온 이들의 아픔을 시로, 산문으로 발표했다. 무대 한가운데 선 작가가 모국어로 시를 읽거나 산문을 읽으면 뒤편에 내려진 영어 자막이 그 내용을 동시번역 했다.

번역된 글을 굳이 읽지 않아도 언어의 운율이, 작가의 육성으로 듣는 글이, 그 전달하고자 한 의미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이래서 프랑스 현대소설의 거장 르 클레지오는 “작가에게 조국은 모국어”라 했던가.

이민자인 우리는 미국에 살지만 모국어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마치 어항을 떠난 물고기처럼 숨을 제대로 못 쉰다. 하지만 2세들에게는 영어가 모국어이다. 부모가 모국에게 가져온 문화, 습관, 가치관은 이해한다 해도 한국말을 능숙하게 읽고 쓰는 이는 드물다. 이민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미국 문단에서 활동하는 한인 작가가 늘고 있지만 이중언어가 능한 작가는 별로 없다.

세계적으로 이중언어로 글을 쓴 작가는 제법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사무엘 베게트, 그는 아일랜드 출신 작가로 프랑스로 귀화하여 영어와 프랑스어로 소설과 희곡을 썼다. 1940년 일본문학계의 최고봉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빛 속으로‘는 작가 김사량이 25세에 일본어로 쓴 작품이다. 그는 조선인으로 일본에 살면서 일본어로 글을 썼지만 내면 언어는 조선어로 썼다고 한다. 작가에게 모국어는 단 하나다. 태어나 처음 익힌 언어는 본능으로 반응하며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다.

이날 강연장 입구에서 황석영의 소설 ‘familiar‘(낯익은 도시)도 판매되었다. 작년에 미국 SCRIVE에서 번역 출간된 이 소설은 과거 꽃섬이라 불린 1980년 중반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쓰레기장 인근에 누더기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이들은 트럭이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 고철이나 유리병, 폐지 등을 허겁지겁 주워 팔며 먹고 살았다. 난지도는 80년대 초반 본인이 직접 취재한 적이 있어 쓰레기 동산이 한도 끝도 없이 펼쳐져있던 풍경이 눈에 선해서 더욱 애착을 갖고 이 소설을 읽었었다.

잘 쓴 한국어 책을 읽으면 머리가 정화 된다. 복잡하고 팍팍한 이민생활에서 모국어는 고향같고 따뜻한 평온을 주는 어머니 같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어머니날이다.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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