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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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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1972년 7월 4일 “남북은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자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흥분했다.

그러나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명서 잉크도 마르기 전인 그 해 10월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종신 집권을 꿈꿨고 그해 12월 김일성은 ‘사회주의 헌법’이란 것을 만들어 주석 직을 신설하고 대대손손 이어지는 김씨 왕조를 건설했다.

그 후 남과 북은 다시 1991년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과 상호 불가침을 골자로 한 남북 기본 합의서를, 1992년에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을 채택했다. 핵무기의 시험과 제조, 생산, 접수, 보유 등 6개항에 걸쳐 남북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은 핵확산 금지 조약(NPT)을 전격 탈퇴,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원자로 폭격을 검토하는 등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이 위기는 1994년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면서 해결된 것으로 여겨졌으며 많은 한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6.15 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과 경제 문화 교류 협력 증대를 약속하면서 한반도에는 다시 평화의 여름이 찾아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02년 북한이 몰래 핵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국이 제임스 켈리 특사를 평양에 보내 추궁하자 북한은 이를 실토하고 제네바 합의 이후 재 가입했던 NPT를 다시 탈퇴, 본격적인 핵 개발에 나섰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10.4 선언을 통해 남북 관계를 상호 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갈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김정은은 2017년 11월 대륙간 탄도탄(ICBM) 발사 성공과 함께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그 김정은이 지난 27일 판문점에서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와 ‘한반도 비핵화’를 약속하자 많은 한국민들은 다시 평화의 봄이 왔다며 들떠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선언문 어디에도 ‘북한 핵 폐기’란 단어는 없다. ‘북한 핵 폐기’와 ‘한반도 비핵화’는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르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개념에는 핵무기를 탑재한 미국의 전략 자산의 한반도 진입 금지와 더 나아가 미군 철수까지 포함될 수 있다.

북한은 2005년 9.19 성명을 통해 “모든 핵 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밝혔고 노무현과의 10.4 공동 선언에서도 이를 확인한 바 있다. 이번 판문점 선언은 이에도 못 미친 것이다.

일부에서는 핵 실험장 폐쇄를 김정은의 “통 큰 결단”이라며 추켜세우고 있지만 폐쇄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김정은은 지난 20일 핵과 로켓이 완료돼 그 어떤 핵 시험과 로켓 발사 실험도 필요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핵 무력이 완성된 상태기 때문에 비싼 돈 들여 더 이상 실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이번 선언에서 북한 핵 부분이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것은 미국과 북한이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다. 북한이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해도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숫자와 위치를 정확히 신고할 지 의문이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불시에 수시로 의심 가는 곳을 모두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외부 사찰단에 줘야 하는데 북한이 순순히 이에 응할 리 없다. 또 북한 핵무기가 오늘 폐기된다 하더라도 북한 과학자 머리 속에 들어 있는 핵 제조 기법까지 지울 수는 없다.

김정은은 중국을 방문해 국빈 대접을 받으며 우의를 다졌고 이번 판문점 회담에서 정상 국가 지도자의 면모를 과시하며 한국민들의 환심을 샀다. 이런 분위기라면 김정은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 미국의 선제 타격은 물 건너갔다고 봐도 된다.

한반도 평화의 봄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지만 북한 핵 폐기까지는 갈 길이 멀고도 멀다. 한반도 해빙에 환호하다 실망으로 끝나는 영화는 수없이 봤다. 샴페인은 좀 천천히 터뜨리는 것이 좋을 듯싶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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