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품격있는 신랑 예복, 신부의 드레스를 빛나게 한다

2018-04-25 (수) 글 이성숙 객원기자/ 사진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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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에 오는 손님, 웨딩 맞이 분주한 ‘이태리 양복점’

▶ 50년 지켜온 장인의 고집, 새 출발 커플에‘최고’ 선사, 은혼식·금혼식 예복 등 다양

대지가 연두 빛으로 변하는 봄은 웨딩의 계절이다. 우중충한 겨울을 털어 낸 양복점에도 봄이 찾아왔다.

윌셔 대로변에 오래 된 소나무처럼 자리하고 있는 이태리 양복점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성복 매장이다. 최근의 트렌드에 맞는 기성 양복이 진열되어 손님을 맞고 있다. 비가 올 듯한 바깥 날씨와 대조적으로 매장은 활기차다.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따듯한 느낌의 조명 아래 넓은 홀이 펼쳐진다. 양복 옷감이 벽을 따라 빈틈없이 진열되어 있고 홀 왼쪽에는 가봉과 재단실이 마련되어 있다. 훤칠한 키의 멕시칸 남성이 예복 가봉을 하느라 실내는 약간 분주하다. 시큼한 옷감 냄새가 오래된 기억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제야 이태리 양복점에 들어선 듯하다.

영어간판 일색인 사이에서 양복점이라니, 그 이름에 시간이 정지되어 보인다. 임구영 사장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건넨다. 그는 세련된 넥타이와 행커치프까지 장식한 정장을 했다. 기자는 대뜸 “요즘 누가 양복 맞추나요?” 하며 21세기적 질문을 던진다. 기자의 까칠한 질문에 19세기 양복점 주인의 털털한 답이 돌아온다. “진짜 멋쟁이들은 아직도 맞춰 입지요.” 손님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변함없이 맞춤 양복을 찾는 사람이 있고, 이태리 양복점을 찾아주는 고객이 있어 양복쟁이로 살고 있다는 것이 임 사장의 대답이다. 그가 매장 곳곳을 안내하며 연신 함박웃음이다. 그의 표정에 장인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 예복의 꽃, 웨딩드레스

봄철은 특히 예복 맞춤이 많은 계절이다. 연말에 몰리는 손님이 파티를 위한 예복을 찾는다면 봄에 오는 손님은 격식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결혼예식은 보통 사람들이 맞이하는 가장 큰 정장 파티가 된다.

신부의 화려한 드레스는 다양하고 풍성한 디자인만으로도 신부를 돋보이게 할 수 있지만 신랑 예복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받쳐주면서도 스스로의 무게감을 가져야 하는 특성상 전문가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대상이다. 특히 남성 수트는 평범함 속에 고도의 디테일을 발휘해야 하는 의상으로 디자인은 물론 바느질이 그 생명이다. 예복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같아 보여도 같지 않은 이태리 양복점의 맞춤옷은 50년 가까운 장인의 집요한 한 땀 한 땀으로 완성된다.

예복의 꽃은 누가 뭐래도 웨딩복이다. 신부의 흰 드레스를 빛나게 하고 남성미를 부각시킬 수 있는 웨딩 양복은 검정색을 기본으로 한다. 검정은 최고의 예복 색깔일 뿐 아니라, 예식에 사용되는 흰색과 검정색은 모든 색과 어울리며 모든 것을 품어내는 파워를 지닌다. 새 출발하는 신랑 신부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성스러운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흰색과 검정은 가장 아름다운 무채색이며 가장 경건한 색의 조합이라는 것이 임 사장의 설명이다. 장례식에도 검정색 옷이 사용되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 은혼식, 금혼식, 재혼예식


예식이 신혼부부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진주혼, 은혼식, 금혼식 등 생애에 의미 있는 시간을 무게감 있게 맞이하려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 재혼 커플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에는 재혼을 특별한 의례없이 조용히 치르곤 했지만 최근의 경향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나머지 인생을 건강하게 살기 위한 출발인 만큼 격식 있는 혼례를 치르려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다.

은혼식이나 금혼식 등 결혼생활을 오래 동안 유지해 오는 커플들은 남성과 여성 모두 고급정장을 하기도 하고, 여성들의 경우 흰색 드레스 대신 핑크색 드레스를 선택하기도 한다. 따듯하고 행복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좋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남성 예복도 색이 바뀌는데 검정색 보다는 짙은 남색이 선호된다. 여성의 핑크드레스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재혼 커플의 경우 본인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데 따라 개성적인 드레스를 선택한다. 잘못된 이전 결혼의 기억을 지우고 새 출발하는 의미로 흰 드레스를 입는 경우도 많고,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의 경우는 보라색 드레스와 검정턱시도를 입기도 한다. 보라색은 여성 파트너를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연출하기 좋은 색이다. 나이로 인해 어두워진 피부톤을 밝아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다.

주인공 커플의 예복이 결정되면 주변 손님과 친구들의 당일 의상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하객의상은 신랑 신부를 비롯한 주인공 커플보다 튀어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컬러파워를 고려한 색감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가령, 신랑이 짙은 감색 수트를 선택했는데 친구가 검정색 턱시도 차림으로 나타난다면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 되고 만다.

한인타운 중심에 있는 이태리 양복점에서는 예식에 따른 커플 예복 상담을 받을 수 있고, 남성 예복은 즉석에서 맞춤도 가능하다.

# 고급 맞춤 예복, ‘그 집’

남자의 매력, 잘 차려입은 양복맵시로 시작된다.

남성 양복의 발견은 현대 복식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군복과 19세기 영국 귀족의 복장에서 유래되었다는 남성 수트는 그 후 미국과 이탈리아를 비롯 유럽 각지로 전파되면서 남성의 클래식 정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기성복이 대중화하면서 다양한 색상과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을 따라 잡을 수 없게 된 맞춤집들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임 사장은 아버지 대로부터 양복집을 운영해 온 맞춤 양복의 명인이다. 한국에서 맞춤양복이 하강국면을 맞자 임 사장은 이민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양복 재단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드디어 1985년, LA로 터전을 옮긴 임 사장은 한인타운에 이태리 양복점을 연다. 고급 맞춤 양복을 컨셉으로 마케팅을 해 나갔고 한동안 이태리 양복점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기성복의 공격과 높은 인건비,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미국에서도 맞춤 양복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전문 재단사나 봉제사들이 고령화하여 업계를 떠나는 것도 맞춤 양복 사업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다. 바느질은 올 다툼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성을 쏟아야 하는 맞춤복의 성격상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면 맞춤 양복의 목적을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경기가 안 좋을 때에도 임 사장은 가게의 몸집을 줄여가며 맞춤 명가의 자존심을 지켜나갔고, 지금까지 기성복과 경쟁하며 고급 맞춤 양복 시대를 이끌고 있다. 이제 이태리 양복점은 한인들만 이용하는 동네 양복점이 아니다. 주류 미국인들이 예복이나 고급 실루엣을 원할 때 찾는 ‘그 집’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복은 평균에 바탕 하기 때문에 내 몸에 딱 맞는 사이즈의 옷을 찾기가 쉽지 않다. 기성복이란 내 몸에 가장 근접한 사이즈의 옷일 뿐이다. 중간 사이즈, 그것이 기성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고, 같은 사이즈라고 해도 자세가 다르고, 피부색과 개인이 선호하는 특별한 색도 있기 마련이다. 이렇듯 다양한 차이와 개성을 표현하려면 맞춤을 할 수밖에 없다.

옷감의 차이에서 오는 고급 질감은 말할 것도 없고 표현되는 실루엣의 차이는 옷을 입은 사람의 품격으로 이어진다. 잘 지어진 옷은 ‘입었을 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옷’이라는 것이 임 사장의 설명이다. 이태리 양복점은 Majeste, VIP President, Vestani 등 고급 브랜드의 텍스타일을 갖추고 있다. 좋은 재료가 음식 맛을 결정하듯이 좋은 옷감을 선택하는 것은 완성복의 품질을 결정하게 된다. 옷감을 고른 후 최적의 실루엣으로 양복이 완성되기까지는 2주 내지 1개월이 걸린다.

# 맞춤 양복에서 기성복으로, 다시 맞춤시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에 남성복 시장은 기성복으로 대체되는 듯했지만 모든 것이 풍족한 현대로 오면서 다시 맞춤양복이 부활하고 있다. 특히 예복은 아직도 맞춤이 기성복을 앞지르고 있다. 예복과 특수복이 아니더라도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 사람들과 나이와 지위에 걸맞는 멋내기에 관심을 갖게 된 장년층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변화다. 양복 맞춤에 셔츠가 빠질 수 없다. 드레스셔츠는 남성 패션의 시작! 깃이나 소매에 이니셜을 새겨 넣은 드레스셔츠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는 맞춤아이템이다. 영화 속 멋진 주인공처럼 각 잡힌 매력남이 되고 싶다면 드레스셔츠의 착용법과 매무새부터 챙겨보기 바란다.

넓은 어깨를 부각시켜 남성미를 돋보이게 하고 겉옷의 맵시를 좌우하는 것이 드레스셔츠다. 드레스셔츠는 속옷에서 유래한 탓에 언더웨어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셔츠 안에 내의를 또 입는다면 넌센스가 된다. 옷차림만큼 중요한 것이 매너인데, 모임 등에서 재킷을 벗어야 할 때 주변에 여성이 있다면 재킷을 벗어도 좋겠는지 먼저 물어보는 것이 좋다. 셔츠가 속옷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울 앞에서 셔츠입기에 정성을 들여 보자. 셔츠 칼라는 재킷보다 1-2cm정도 올라오도록 한다. 단추를 잠근 다음 목 부분을 살짝 잡아 당겨 타이를 맨다. 타이의 매듭(노트) 부분을 적당한 위치에 만들고 너무 조이거나 느슨하지 않도록 한다. 바지 속에 잡아넣은 허리부분의 옷자락은 여분이 남지 않는 것이 좋다. 이때 맞춤셔츠의 매력이 발산된다. 기성복 셔츠는 목둘레나 어깨 넓이 정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몸통에 해당하는 셔츠 끝자락 사이즈까지 고려되지 못한다. 소매길이는 양복을 입었을 때 커프스가 살짝 보이는 정도가 알맞다.

앞서 언급했지만, 잘 차려 입은 맵시 안에 깃든 세련된 매너는 매력의 방점이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오래된 저서 <남자들에게>를 통해 남자의 매력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매력 있는 남자란 정직함이 바탕이 된 자신감, 윤리와 상식 등에 자유로운 사람, 궁상맞지 않은 사람, 편견이 없고 부드러운 인간성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추상적인 감이 있지만 마음에 새길 만하다.

# 마음까지 맞춘다.

예복은 옷만 맞추는 게 아니고 마음까지 맞추는 작업이다. 그 옷을 입게 되는 날의 분위기와 행사 내용, 주문자의 마음까지 살피면서 재단에 들어간다. 마음까지 재단하는 것, 그것이 이태리 양복점을 구별되게 하는 마지막 한 수다. 임 사장의 이런 노력은 완성복이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라는 기자의 반응에, 그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 그의 옷을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 나의 연애와 결혼

임 사장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해졌다. 이메일이나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의 결혼이야기다. 6개월가량 매주 빠짐없이 손편지를 써 보내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이어온 두 사람이다. 손편지를 써 보내다가 그리움이 앞서 한국을 찾았고, 급한 마음에 청혼한 것이 오늘까지 살고 있는 아내 명희 씨다. 아내는 살면서 한 번도 남편에게 “노우”를 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임 사장은 자신의 연애시절을 상기하며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식에 공을 들이는 걸 보면서 자신들의 결혼식은 참 싱거웠다고 회상한다. 그러면서 요즘엔 결혼식이 부쩍 형식에 치우치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2, 3년은 사귀어 봐야 하고 결혼식 준비를 위해 플래너가 동반되어야 하며 6개월 이상의 준비기간을 갖는 것이 결혼식의 정설이 된 듯한데 오래 사귀어봐야만 상대방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의도적으로 감추는 게 있다면 상대방이 그것을 알 도리는 없다.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가슴과 가슴이 합쳐지는 것인 만큼, 결혼 전 연애기간은 결혼생활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결혼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만나 온 시간이 아니라 신뢰라는 일축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한 임 사장은 요즘도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결혼서약이 지켜지게 하소서.

▲이태리양복점 주소

3100 Wilshire Blvd. Unit105, LA

▲전화: (213)321-0540

<글 이성숙 객원기자/ 사진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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