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을’ 에게 손 벌리는 ‘갑’…강요된 돈거래도 ‘미투’

2018-04-25 (수) 강동효·이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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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가 학생연구비 제돈 쓰듯, 부하·거래업체에 급전 요청 등

▶ 권력 이용한 압박 관행 여전

‘을’ 에게 손 벌리는 ‘갑’…강요된 돈거래도 ‘미투’

한국의 일부 대학에서 교수가 학생 연구비를 남용하는 등의 부정행위가 만연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시내 한 대학의 강의 모습.

농업유전자 관리에 대한 연구를 하던 서울의 한 사립대 대학원생들은 지난 8년간 연구실에서 사실상 ‘무임노동’을 해야 했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비가 없어서가 아니다.

대학원생 명의의 은행 계좌로 연구비가 들어왔지만 해당 계좌의 통장과 체크카드를 A교수가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책임자인 A교수는 지난 2008년1월 교내 은행의 한 학생 계좌에서 30만원을 출금한 것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8년간 382회에 걸쳐 학생들의 계좌에서 인건비 3억8,600만원을 빼내 사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또 연구비 신용카드로 연구재료 업체에서 물품을 허위로 구입하는 소위 ‘카드깡’ 방식으로 연구비 1억6,000만원을 빼돌렸다. 결국 그는 연구비 횡령과 사기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해당 사건을 조사했던 서울 중부경찰서 관계자는 “연구원이나 학생들은 이런 방식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 제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의 한 팀장은 골프 티칭프로 자격증을 따기 위해 상당한 돈이 필요했다.

그는 2억원 가까운 돈을 빌릴 데가 마땅치 않자 자신의 직위를 이용했다. 팀 소속 부하직원은 물론 업무와 관련 있는 업체 직원들에게서 상당한 금액을 빌렸다.

그에게 돈을 빌려준 기관 내 직원과 업체 관계자만도 무려 78명에 달했다. 그는 빌린 돈 2억1,100만원 가운데 6,200만원은 갚지도 않았다.

이 기관의 또 다른 팀장 역시 자녀 유학비 등 목돈이 필요하자 부하직원과 업체 관계자에게 1억7,000만원이 넘는 돈을 빌렸다. 그는 내부 감찰이 시작될 당시까지 빌린 돈 중 8,500만원을 갚지 않고 있었다.

‘미투운동’ 등 권력자의 횡포와 잘못된 관행을 폭로하는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수직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요된 돈거래 문화’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정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관념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행위들이 현재와 같이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시점에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 내에서 암묵적으로 이뤄지는 상·하급자 간 돈거래는 하급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으로 보기 어려워 조직의 건전성을 해치는 등 상당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또 대학 내에서 교수가 연구비를 독식한다든지 회식비를 대학원생들에게 떠안기는 행위 역시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착취행위가 될 수 있다.

권원기 신한대 공공행정학과 교수는 “과거 한국사회의 온정주의가 현재의 도덕적 눈높이에는 전혀 맞지 않고 합리성을 벗어나 있다고 봐야 한다”며 “상하관계에서는 가벼운 부탁이라도 하급자의 위치에서는 큰 부담을 줄 수 있는 만큼 그동안의 관행이라고 하더라도 문화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서울의 한 사립대 A교수는 법원의 1심 판결에 억울함을 주장하며 항소한 상황이다. A교수의 연락처와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 변호인인 법무법인에 세 차례 전화를 했지만 담당 변호사는 응하지 않았다.

<강동효·이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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