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공정한 게임

2018-04-24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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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서양에도 ‘옷이 사람을 만든다’(The suit makes the man)이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동서양 모두 기본적인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과연 이런 속담이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 실제로 벌어진 적이 있다. 1971년 스탠포드 대학은 24명의 자원자를 선발해 12명에게는 죄수복을, 12명에게는 간수복을 입혀 죄수와 간수 역할을 맡게 했다. 원래 2주 예정이던 이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됐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간수들은 잔인하고 가학적인 성격으로 바뀌고 죄수들은 비굴해지며 복종적인 모습으로 변해 갔으며 그 정도가 허용할 수 있는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UC 버클리에서 실시된 ‘불공정한 모노폴리 실험’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줬다. 100명의 참가자를 두 팀으로 나눠 한 쪽은 처음부터 판돈을 2배로 주고 보너스도 2배로 받게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한 쪽이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승패도 예상대로였다. 예상과 다른 것은 애초에 불공정한 룰로 시작한 게임인데도 승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오만해지고 이긴 것은 자신들이 현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익과 성공이 걸린 문제에 관해서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게임이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나오고 싶어 나온 사람도 없고 자기 몸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를 선택한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를 만나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튼튼한 몸을 갖고 태어났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부모 밑에서 그렇지 못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게 다가 아니다. 좋은 유전자를 가진 부모는 대개 공부도 잘 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사회에 나가면 어떤 차별을 받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잘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성공 요인을 분석해 보면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유전자와 환경 요인이 훨씬 크다는 것이 정직한 답일 것이다. 거기다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같은 노력을 했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시험도 사업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양자 물리학자이자 저널리스인 플로리안 아이그너는 최근작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에서 세상은 근본적으로 우연이 지배하는 곳이라며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 모두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만 이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연이라는 것을 양자 역학과 혼돈(chaos) 이론 등을 통해 설명한다. 성공한 사람은 자만해서는 안 되며 실패했다고 지나치게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국은 요즘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횡포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조양호 회장의 장녀 조현아가 소위 ‘땅콩 회항’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차녀 조현진이 회의 중 물컵을 던져 공분을 사고 있다.

이와 함께 두 딸의 어머니인 이명희 폭언 폭행 사실이 폭로되고 오랫동안 조씨 일가가 외국에서 고가품을 사고 관세를 포탈해왔다는 의혹까지 겹치면서 사면초가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뒤늦게 조회장이 두 딸들은 모두 경영 일선에서 물러서게 하겠다고 밝혔지만 이것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달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대한항공의 모체인 한진은 1945년 지금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두 딸의 조부인 조중훈이 트럭 한 대로 시작한 회사다. 그는 회고록에서 “기업은 곧 인간이며 인화가 중요하다”며 “최고 경영자라고 해서 너무 강철처럼 딱딱하고 고압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다.

한국에는 “3대 가는 부자 없다”는 말이 있고 미국에는 “3대 안에 넝마에서 넝마로” (From rags to rags in three generations) 라는 속담이 있다. 조부가 아무리 애를 써 일궈 놓아도 자식까지는 그런대로 지키지만 3대가 되면 창업과 수성의 고통은 모두 잊고 그 열매만 즐기며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기고만장해 하다 망한 사례가 수없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조씨 일가가 창업자의 가르침에만 충실했어도 오늘 같은 망신은 피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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