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마음이 되자

2018-04-18 (수)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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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식을 맞아 롱아일랜드로 성묘를 다녀오는 길에 제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 대통령이 살던 집 오이스터 베이 사가모어 힐을 방문했다. 언덕 위에 빅토리아풍 3층 저택이 있고 농장, 동물사육장, 과수원, 대통령 박물관이 광활한 대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었다.

‘테디’라는 애칭을 가진 시오도어 루즈벨트는 네덜란드계 성공한 이민자 가문 출신으로 맨하탄 20가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은 어퍼이스트 사이드에서 보냈다. 1884년 첫 아내 앨리스 사망 후 2년간 서부로 갔다가 뉴욕으로 돌아와 에디스와 재혼, 이곳 오이스터 베이에 정착하여 6자녀와 함께 승마, 사냥, 테니스 등 전원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대통령 시절에는 워싱턴 DC의 더위를 피해 여름 백악관으로 이용했으며 루즈벨트가 세상을 떠난 장소이기도 하다.

학자, 농장주, 군인, 카우보이, 경찰, 탐험가, 정치인 등 여러 직함을 가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살던 집을 굳이 가고 싶었던 것은 이곳이 한국의 역사와 연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 사가모어 힐은 꺼져가는 조선이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간 대미 외교 사적지이다.


지금도 이곳을 가려면 롱아일랜드 해변까지 한참 들어가야 하고 숲이 울창한데 113년 전에는 얼마나 멀고 험난한 길이었을까? 하와이 한인대표로 간 이승만과 윤승구는 이 집 어디서 루즈벨트 대통령(임기 1901~1909년)을 만났을까? 1층 라이브러리? 아니면 야외 테라스? 그곳 테라스 의자에 앉아 흰 셔츠를 받쳐 입은 검정예복에 검정 탑 해트를 쓰고 대통령을 만난 이승만을 상상해 본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1905년 8월 미국이 중재하는 포츠머스 러일 강화회의에 한인대표를 파견했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찾아가 청원서 문장을 다듬은 다음 1905년 8월4일 뉴욕 주 오이스터 베이의 사가모어 힐로 루즈벨트를 찾아갔다. 1882년 조미 수호조약을 상기시키고 조선의 주권과 자주독립 보장을 도와달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와이 거주 8,000여명의 한인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는 묵살 당했다. 겉으로는 청원서가 정부의 공식문서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미 그 이전에 루즈벨트는 일본으로 간 윌리엄 태프트 대표단에 의해 7월29일 미일 비밀협약을 맺었다. 태프트 가쓰라 협약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국익을 도모하는 강대국의 눈으로 보면 조선은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없는 나라였다. 약소국에 대한 제국주의 노선을 고수하여 일본 편을 들어 주었다.

루즈벨트가 거절한 조선의 해방에 대한 도움은 그의 조카사위인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해 주었다. 뉴딜 정책으로 유명한 32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1943년 영국 처칠 수상, 중국 장개석 총통과 합의한 카이로 선언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주권을 빼앗긴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지금도 개인이나 단체나 나라나 힘이 없으면 무시당하기 쉽다. 기분이 상하거나 화내기 전에 내가 강해져 약한 자를 도와주면 된다.

지금까지도 잘해왔지만 한국이 더욱 강해지려면 한국민은 물론 재외국민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적 결과를 염원해야 한다. 이 하나된 정신적 통합이 국력이 된다.

사가모어힐에서 루즈벨트와 이승만의 만남은 30분 정도, 외교활동이 성공했던 실패했던 지난 외교사는 중요하다. 이곳을 다녀오면서 오래된 구호가 생각났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사가모어를 찾아간 갓 30세 청년 이승만이 1948년 한국 초대 대통령이 되어 수시로 했던 말이다.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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