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블루 쓰나미

2018-04-10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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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쿨터는 미국을 대표하는 백인 여성 보수 칼럼니스트의 하나다. 그가 쓴 최근 베스트셀러 제목인 ‘우리는 트럼프를 믿는다’(In Trump We Trust)만 봐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쿨터는 가장 먼저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출마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아무도 그의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을 때 그의 당선을 점쳤던 사람이기도 하다.

2015년 트럼프가 대권 도전을 선언하며 멕시코 이민자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았을 때 그가 한 말은 쿨터의 2015년 베스트셀러 ‘아디오스, 아메리카’에서 통으로 따온 것처럼 비슷하다. 이 책의 부제는 ‘좌파는 어떻게 우리 나라를 제3세계 지옥 구멍(Hellhole)으로 바꿔놓으려 하고 있는가’다.

그러던 쿨터가 요즘 변했다. 그는 최근 트럼프가 1조 3,000억 달러에 달하는 내년 예산에 서명한 것을 두고 190만의 팔로워가 있는 자기 트위터를 통해 “축하한다, 대통령 슈머”라고 외쳤다. 슈머는 민주당 상원 원내 총무로 이번 예산안에 트럼프의 핵심 공약인 멕시코 국경 장벽안과 가족 이민 축소 등 이민 규제안이 빠져 있는 것을 빗대 지금 미국 대통령은 사실상 슈머라고 비꼰 것이다.


그걸로는 분이 안 풀렸는지 컬럼비아대 강연에서 그는 트럼프를 “얄팍하고 게으르고 무식한 인간”이라고 불렀으며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는 “과거 트럼프 지지자들을 생각한다면 트럼프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가 잠 못 이룰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2016년 대선 기간 동안 트럼프 진영과 러시아의 내통 관계를 조사를 벌이고 있는 특검이 그의 목을 조이고 있고 2006년 포르노 스타와 성관계를 맺고 그 입막음으로 준 돈이 수사 선상에 올라 변호사 사무실 압수 수색까지 당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보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쿨터로 대표되는 전통 지지 기반의 이탈이다. 대선이 끝난 후 다음 열리는 중간 선거에서 집권당이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다 트럼프 같이 지지율이 낮은 40%대를 기고 있는 경우 공화당의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와중에 백인 중하류층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다면 올 11월 중간 선거는 단순히 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치 판도를 바꾸는 ‘블루 쓰나미’가 될 가능성도 있다.

벌써 그런 조짐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트럼프 집권 후 공화당은 작년 11월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 진 데 이어 12월에는 새빨갛기로 이름난 앨라배마 연방상원 선거에서 졌고 올 3월에는 2016년 트럼프가 압승을 거둔 펜실베이니아 18지구 연방하원 선거에서 졌다. 거기다 최근 위스컨신에서 열린 대법원 판사 선거에서 23년만에 처음 공석이 된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민주당 리버럴이 공화당을 이겼다. 스캇 워커 위스컨신 주지사가 올 가을 “푸른 파도”를 경고한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최근 트럼프의 잇단 돌출 발언과 행동은 이런 정치판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트럼프는 중미에서 출발한 불법 이민자 캐러밴이 미국 국경 지대로 진격하고 있다며 “군대”를 보내 이를 막겠다고 선언한 뒤 주 방위군 파견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캐러밴은 멕시코 시티에 도달하기 전 대부분 자진 해산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캐러밴이 해체됐다”며 이는 “멕시코의 강력한 이민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멕시코를 칭찬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트럼프의 있지도 않은 중미 이민자들의 미국 침공에 관한 호들갑은 쿨터 같이 국경 장벽 건립과 이민자 축소 공약 실현 실패에 분노한 지지자들을 달래고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정치적 술책에 불과하다. 최근 중국과의 무역 분쟁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럼프가 중국 물건에 대한 500억 달러의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자 중국은 500억 달러의 보복 관세로 대응하겠다고 나왔다. 그러자 트럼프는 1,000억 달러의 추가 보복 관세를 경고하고 나섰다. 전형적인 치킨 게임이다. 치킨 게임은 일단 시작하면 나중에는 자신이 더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그만 두지 못하는 수가 있다. 중국의 보복 관세로 농산물 수출이 막힐 경우 그 타격을 고스란히 안아야 하는 아이오와와 캔사스의 농민들이 트럼프와 공화당을 예쁘게 봐 줄지 두고 볼 일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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