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무 이야기도 없는 장소’

2018-04-05 (목) Robinson Jeff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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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이야기도 없는 장소’
Sovranes Creek 해변의 언덕;
한 그루 나무도 없었지만, 깊은 향의 풀밭이
불꽃처럼 생긴 바위를 얇게 덮고 있는 곳
대지의 발끝에 열린 오래된 바다. 길고 하얀
격렬함 뒤로 펼쳐진 회색들.
저 멀리 어두운 언덕 위로는
보일 듯 말 듯, 한 떼의 암소와 황소들,
나르는 매들과 두려울 만큼 매혹된 회색빛 공기,
이곳은 내가 본 가장 고귀한 장소, 그 어떤
인간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
단지 자신을 지켜보는
고독한 열망 속으로
녹아들 수 있을 뿐

Robinson Jeffers ‘아무 이야기도 없는 장소’
임혜신 옮김

시인이 본 가장 고귀한 장소라니, 문득 Sovranes Creek 해변을 찾아가고 싶어진다. 평화와 격렬함이 함께 어울린 그곳에 가서 나도 나만의 풍요한 고독 속으로 한없이 녹아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너무나 머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래서 가만 생각해본다. 이 시는 관광 팸플릿이 아니지 않는가.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순간이었던 것이다. 고독한 열망 속으로 몰입하는 신비한 시간을 말하려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독이 깊어서 들끓던 이야기와 번민조차 끝나는 곳이라면 어디고 이 해변처럼 아름다운 장소가 아닐까. 여전히 Sovranes Creek의 해변이 가보고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임혜신<시인>

<Robinson Jeff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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