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킹 목사 암살 50주기… 여전한 미국 인종차별의 ‘그늘’

2018-04-04 (수) 12:00:00
크게 작게

▶ 직장·임금 분야서 차별 상존…“구조적이고 숨겨진 차별”

▶ 킹 목사는… 50~60년대 흑인 민권운동 주도·노벨평화상

킹 목사 암살 50주기… 여전한 미국 인종차별의 ‘그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해인 1968년 6월19일 워싱턴 DC에서 대규모 군중이 민권 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AP]

4일은 미국의 대표적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지 만 50주년이 되는 날이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인종차별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AP통신은 연방 정부 자료 분석을 토대로 정보기술과 사업, 생명과학, 건축, 공학 분야의 고임금 직종에서 만성적으로 백인 대표자들이 흑인보다 더 많이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또 미국의 흑인 다수는 음식 제공·준비와 건물 보수, 사무 업무와 같이 저임금에 혜택도 적은 일자리를 찾아다닌다고 분석했다.


일례로 미국 노동통계청에 따르면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11개 직군에서 백인 노동자들이 흑인들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킹 목사와 깊은 관련이 있고 ‘기술혁신의 허브’로 통하는 보스턴에서도 백인 노동자 수가 컴퓨터와 수학 관련 전문직에서 흑인과 비교해 약 27명대 1명꼴로 많았다. 보스턴의 투자자들도 백인이 운영하는 벤처기업을 훨씬 더 지지하는 것 같다고 일부는 말한다. 보스턴은 킹 목사가 박사 과정을 밟고 그의 부인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노스이스턴대학 듀카키스 센터의 시어도어 랜즈마크 이사는 “구조적 차별”이 고임금 분야에서 인종 불균형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dpa 통신도 킹 목사가 암살당한 멤피스의 현 상황을 설명하며 지금도 피부 색깔에 따라 거주 구역이 구분돼 있으며 미국 소수 흑인의 생활 조건도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과 비교해 열악하다고 진단했다.

멤피스대학의 안드레 존슨 교수는 숨겨진 인종차별이 있고 흑인들이 차별과 편견에 맞설 필요가 있다며 “우리가 계속 투쟁하는 한 미래 시대가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걸 논의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것이란 희망도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dpa 통신은 실업률과 수입 구조, 재소자 현황, 빈부 격차 등에서도 미국에 사는 백인과 흑인 간 차이가 뚜렷하다고 전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 생으로 1950~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했으며, 특히 지난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란 명연설을 통해 인종차별 철폐와 인종 간 공존을 호소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킹 목사는 1968년 4월4일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흑인 청소부들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암살돼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킹 목사는 숙소인 로레인모텔 306호 발코니에서 거리의 군중과 이야기하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백인우월주의자로 알려진 총격범 제임스 얼 레이는 두 달여 뒤인 6월8일 영국 런던에서 체포돼 99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킹 목사의 피살을 둘러싸고 연방수사국(FBI) 및 군부 배후설 등 온갖 음모론이 제기됐으나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레이는 1998년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그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분노한 흑인들이 미국 전역의 168개 도시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폭동으로 번져 46명이 사망하고 2만1,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2,600여 곳이 불에 탔다.

그는 침례교 목사였던 부친을 따라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돼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듬해 12월 몽고메리에서 시작된 ‘버스 보이콧’ 운동은 그를 저명한 흑인민권운동가로 만들었다.

버스 앞좌석에 앉은 흑인 여성 로자 팍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자 킹 목사는 버스 탑승 거부운동을 주도해 “인종 간 버스 좌석 분리는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끌어냈다.

196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는 흑백 갈등으로 인한 유혈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잔인한 폭력을 동원해 흑인들을 탄압하자 흑인들의 투쟁도 격렬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킹 목사는 비폭력 투쟁 노선을 고수하며 흑인에게는 자긍심을 불어넣고 백인에게는 부끄러움을 깨닫게 했다.

노예해방 선언 100주년을 맞아 1963년 8월28일 워싱턴DC에서는 인종차별 철폐와 직업·자유를 촉구하는 군중 25만 명이 운집해 국회의사당 앞에서 링컨기념관 앞까지 행진했다. 행진이 끝나고 연단에 오른 킹 목사의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중략)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라고 연설해 미 역사상 최고 명연설의 하나로 기록됐다.

1964년 1월 ‘타임’지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해 10월에는 역대 최연소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뽑혔다. 이를 계기로 킹 목사는 흑인 차별 철폐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시야를 넓혔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