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짓을 이기는 시간

2018-03-27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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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동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었다. 그가 정치사에 이름을 남긴 유일한 이유는 2011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사상 처음 최루탄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한미 자유 무역협정(FTA) 의결을 막기 위한 이 행동으로 그는 기소돼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지만 좌파와 ‘진보’ 단체로부터 ‘제2의 안중근’이란 평을 받았다.

반면 이를 추진한 김현종 교섭 본부장, 김종훈 실무 수석 대표 등에게는 ‘제2의 이완용’ ‘신 을사 5적’이란 호칭이 따라 붙었다. 한미 FTA가 통과되면 ‘값싼 수입 농산물이 몰려들어와 대한민국 농민들은 유랑 걸식을 한다’느니 ‘한국 경제는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한다’느니 하는 괴담이 떠돌았다.

한미 FTA가 추진된 것은 2006년 노무현 정부 때였지만 한 때 이를 지지하는듯 했던 정동영, 천정배, 한명숙, 유시민 등은 정권이 바뀌자 반대로 돌아섰다. 2007년 협상 개시 후 14개월만에 이를 타결하고도 2011년이 돼서야 국회 비준을 얻어낸 것은 반대 세력의 집요한 공작과 이에 휘둘린 국민 여론 때문이었다.


반대 세력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은 2008년 봄 터진 광우병 시위다. 한미 FTA 협정과 맞물려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하기로 하자 이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촛불 시위가 벌어졌다. ‘이명박이 국민 위생 주권을 미국에 팔아 넘겼다’ ‘한국인은 광우병에 잘 걸리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명박아, 미친 소고기 너나 먹어라’ 등등 온갖 괴담과 욕설이 쏟아졌다. 그 해 5월부터 7월까지 100일 넘는 기간 동안 수백만 시민이 광우병 시위에 참가해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을 벌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수천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었지만 광우병으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광우병 왜곡 보도에 앞장선 MBC는 대법원으로 부터 왜곡 보도에 관한 정정 명령을 받고 사과 방송을 내보냈으나 정작 왜곡 보도를 한 기자나 광우병 시위를 주도한 단체, 정치인 치고 지금까지 진심어린 참회나 사죄를 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FTA도 마찬가지다. 그 시행 후 지금까지 5년이 지났지만 한국 농민은 유랑걸식 하지 않고 한국이 미국 식민지로 전락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미 무역 규모와 미국내 한국 상품 정유율은 꾸준히 상승했으며 대미 무역 흑자 규모는 매년 수백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집요하게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한 것도 이 협정이 한국에 유리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물론이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지난 수개월 간 진행돼 온 FTA 재협상이 지난 주 타결됐다. 한국은 미국 안전 기준을 통과한 자동차 한국 수출 물량을 현 2만5,000대에서 5만대로 늘려주고, 미국 수출 철강 물량을 70%로 제한하는 선에서 미국산 관세를 면제받기로 했다. 대체로 원만한 타결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번 협상 타결과 관련, 특이한 것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한미 FTA 시행에 반대하는 시위도 성명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가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 이상 근거 없는 괴담으로 국민들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좌파 단체와 ‘진보적’ 지식인들도 깨달은 모양이다. 대한민국을 위해 다행한 일이지만 이들 중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딱한 일이다.

지금은 아득한 옛 일 같지만 한미 FTA와 관련, 미국이 스크린 쿼터 축소를 요구하자 한국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 다 죽는다’면서 삭발을 하며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스크린 쿼터는 2006년부터 146일에서 73일로 줄어들었지만 한국 영화는 지난 10년 간 날로 발전하며 툭 하면 1,0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역대 흥행 10위에 랭크된 한국 영화 중 9개가 2006년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대미 무역에서 광우병, 스크린쿼터에 이르기까지 한미 FTA와 관련된 이슈 치고 그 반대자들과 그들이 퍼뜨린 괴담이 옳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 사회는 지난 10년 간 이들 때문에 숱한 혼란을 겪었지만 이제는 국민들도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시간을 이기는 거짓은 없는 모양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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