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악관 비밀 정보망 설치에 3,600달러 책정”

2018-03-19 (월) 정리 이종국 기자
작게 크게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20

▶ ■KCIA 요원 손호영의 의회 증언

“백악관 비밀 정보망 설치에 3,600달러 책정”

프레이저 소위에서의 증언 전에 미 당국의 보호를 받던 손호영과 심야에 비밀리에 만난 연방 법무성 건물. 원내 사진은 워싱턴 포스트의 밴 브래들리.

-법무성에서 심야의 비밀 만남
손호영이 의회에 불려나오기 전, 그를 비밀리에 만난 적이 있다. 프레이저 소위에서의 증언이 예정된 11월29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하원 윤리위의 탐 F. 검찰관과 나는 밤늦게 워싱턴 D.C.의 법무성을 방문했다. 의회와 백악관의 중간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있는 법무성 건물로 들어서자 우리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커다란 방으로 안내됐다. 대리석으로 된 컴컴한 방은 음산했다.
잠시 후 그가 나타났다. 연방 증인 보호조치를 받고 있던 손호영 KCIA 뉴욕 거점장이었다. 그가 망명하면서 가져온 ‘76 대미공작 방안’에 관련 부처의 이목이 집중돼 있을 때였다. 우리의 관심사는 미 의원들에 대한 뇌물 정보였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 의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정보를 알고 있나?”
“아는 게 없다.” 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비밀스런 그 밤의 만남은 오래 끌 필요가 없었다. 그는 윤리위 조사에 보탬이 될 게 없었다.

-교포들 친북화를 막아라
손호영이 미국 측에 제공한 ‘76 대미공작 방안’은 한문과 한글을 섞어 만든 23페이지 분량의 2급 비밀문서였다. 제목처럼 그 기밀문서는 경천동지할 공작 방안을 담고 있었다. KCIA는 대미 공작의 목표를 세 가지로 설정했다.
첫째는 북괴의 대미 직접 접촉 기도를 봉쇄하고 미국 내 친북세력들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 둘째는 미국의 대한(對韓) 안보 보장 및 유대 강화, 셋째는 재미 교민들에 대한 북괴의 침투를 저지하고 와해하는 것이다. 월남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당시 미국에서는 반전(反戰)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또 대다수의 해외교포들은 한국의 유신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들 대다수가 가입한 일본의 조총련처럼 재미교포들의 친북화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제시된 공작 대상은 미국의 각계 인사들을 망라하고 있었다. 정계에서는 의회의 민주당 자유진보파 의원들과 그 참모들이 주요 대상이었으며, 행정부에서는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CIA, FBI 인사들이 대상이었다. 언론계 공작에는 미국 미디어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친한 및 반한 교포 신문들도 포함됐다. 또 종교계와 학계의 반한적인 고명한 인사들 그리고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한 공작방안도 적시됐다.
얼핏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프레이저 위원장이 “동맹국에 대한 전복 행위”라며 분기탱천하는 것이 일리가 있어 보일 정도였다.
또 문서에는 ‘포섭’ ‘조종’ ‘중립화 한다’ 등의 표현도 기재돼 있었다. 누가 봐도 갱들의 불법행위로 읽히는 내용이었다. 기실 미 언론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함병춘 주미대사는 미국 기자들에게 “KCIA는 깡패(Goon) 근성이 있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WP 주필 “난 들러리야”
프레이저위원회가 이 문서에서 산출된 대미 공작비를 종합해보니 1년에 75만 달러였다. 예산안을 들여다보면 백악관에 정보망을 설치하는데 연 3천600불이 책정돼 있었다. 백악관 비밀 정보망 가동을 위해 12개월간 3명에게 매달 100달러씩 쓴다는 것이다.
백악관 선물 예산 항목은 450달러였다. 3명에게 50달러짜리 선물을 세 번에 걸쳐 준다는 것이다. 또 미 의원과 참모 3명을 한 그룹으로 해서 한국에 초청하는데 드는 항공권 비용은 각 1천100달러씩 왕복 6천600달러로 잡아놓았다. 의회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내 공작비로는 70만원을 책정했다. 누가 들여다봐도 어설프고 우스운 ‘공작방안’이었다.
언론계 공작대상 중에는 밴 브래들리 워싱턴 포스트 주필도 포함돼 있었다. 얼마 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더 포스트>란 영화에도 등장했지만 그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사임케 만든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특종 보도를 진두지휘한 전설적 인물이었다.
KCIA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며 100달러씩 3회에 총 300달러를 점심 값으로 쓸 것이라고 했다. 한번은 어떤 데스크 기자가 브래들리에게 물었다.
“점심에 초대 됐나요?”
“난 초대를 못 받았어. 난 들러리인가 봐.” 브래들리도, 기자도 웃었다.
‘76 대미공작방안’이란 거창한 제목의 문서는 탁상에서 만들어낸 공론 계획서였다. 손호영의 독백에 의하면 주미대사관의 정보부가 뭔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예산을 더 따내려고 만든 허구의 페이퍼였다. 손은 그 문서를 김용환 공사가 만든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조선호텔에서 만난 김용환 공사의 고백
코리아게이트가 마무리된 후인 1979년 봄, 나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평소 개인적으로 알던 사이인 김용환을 찾아갔다. 76년 당시 주미대사관 KCIA 공사였던 그는 중정에서 물러난 후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 사장으로 있었다.
나를 본 그는 거북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에게는 오점으로 남아 있는, 잊고 싶었던 악몽이 되살아나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간단히 대화를 나눈 후 자리를 떴다. 대화 중에 그는 자신이 문제의 대미 공작안을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대미 공작안은 내가 작성한 거요. 그런데 그만… 일이 꼬였소.”
76년 초, 주미대사관의 김용환 공사가 휴스턴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휴스턴 중정 거점장은 손호영이었다. 손에 따르면 김 공사는 그에게 문제의 대미공작 방안을 처음 보여줬다. 아마도 손은 그때 받은 그 기밀문서를 보관했다가 ‘망명 선물’로 미국 측에 제공한 게 아닌가 한다.

-김형욱 증언 막아라
29일이 대미공작방안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30일 열린 청문회의 주 의제는 김형욱이었다. 손호영은 김형욱을 담당했지만 본부의 지령에 따라 그를 직접 접촉한 사실은 없었다. 손은 방콕에 주재할 당시 현지를 방문한 김형욱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이틀째 청문회에서는 손호영이 제출한 10개의 전문(電文)이 증거로 채택됐다. 처음 전문은 김형욱의 뉴욕타임스 회견에 놀라 한국에서 보내온 지시였다.
“그 내용을 알아보라. 왜 김형욱이 갑자기 나와서 그러느냐. 앞으로 행동은 어떻게 나올 것인지도 알아보라. 그리고 김재현 변호사는 어떤 사람인지 접촉해보라.”
첫 전문에는 김형욱과 친한 이를 통해 그의 마음을 돌려보라는 내용도 있었다.
“백태하로 하여금 김형욱을 설득하게 하라. 그래서 의회 증언을 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설득이 안 돼 증언할 경우 독소 요소를 빼도록 하라.”
백태하는 김형욱과 같은 육사 8기로 5.16 주체 중의 한명이었다. 중정 서울 분실장과 6국장 등을 지냈으며 73년 가족과 도미한 후 김형욱과 왕래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 온 밀사들
뉴욕타임스 회견에 이어 김형욱이 미 의회에서 증언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청와대는 다급해졌다. 그를 회유하기 위한 여러 밀사가 파견됐다. 그 중의 한명이 김형욱과 같은 황해도 출신이자 군 선배인 민병권(閔丙權) 무임소 장관이었다. 6월17일 전문에는 민병권 장관의 미국 밀파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민 무임소장관이 미국에 간다. 표면상 방미 이유는 국제 공해법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의 신변보호에 유의하라. 그리고 민 장관에게 김형욱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하라. 민 장관의 여행은 극비에 속한다.”
민 장관이 미국을 다녀간 후 보고한 전문도 들어 있었다. 민 장관과 김형욱-신영순 부부, 백태하 부부, 재미교포로 김과 친한 유영수 부부가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함께 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형욱은 귀국하자는 민의 설득에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한국에서 굉장한 냉대를 받고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내 뒷조사도 했다. 내가 미국에 온 후 모든 한국 사람들은 날 기피했다. 내 아들과 처의 여권 발급도 한국정부가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을 가겠느냐. 그간 미 정부 여러 곳에서 나에게 협조를 원해왔지만 거절했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 보도는 전부 부정적이다.”
그러자 민병권은 그에게 제3국행을 권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제3국으로 가라.” 민 장관의 설득작업도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프레이저 위원장은 손이 증언한 한국 측의 김형욱 저지 설득 공작을 또 하나의 ‘대미파괴 음모’라고 규정지었다.

-손호영의 그 후
손호영의 이틀에 걸친 의회 증언은 끝났다. 그는 다시 미 당국의 보호 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 망명객인 손호영은 한 번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나도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아마 김상근처럼 이름을 바꾸고 신분도 세탁한 후 미국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것이다. 증언하면서 보여준 그의 고뇌에 찬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리 이종국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