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철 만난 아첨꾼들

2018-03-19 (월)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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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만난 아첨꾼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들은 미국과 메시코와의 긴밀한 경제관계가 깨어지거나 중국과의 무역 전쟁이 시작될 것으로 우려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멕시코, 캐나다와의 자유무역협정이 여전히 위협받고 있고, 중국의 일부 상품에 트럼프가 관세를 매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역과 관련한 트럼프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유럽연합(EU)을 타깃삼아 초점이 맞춰졌다.

그는 트윗을 통해 EU가 미국산 수입품에 ‘지독한 무역장벽과 관세’로 맞서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여러모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트럼프주의가 상당부분 인종적 적대감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유럽을 무역전쟁의 상대로 골라잡은 것은 아무래도 미심쩍다.

게다가 미국은 늘 EU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제도적 결함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어쨌건 세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기축세력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블라디미르 푸틴 등 반 자유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그룹이 아니라 우방국 집단과 침 뱉기 대결을 벌이려는 걸까?

이 모든 것 너머에는 트럼프의 잘못된 ‘팩트’(facts)가 자리 잡고 있다. 수출업자들에게 제공되는 미국 정부의 자체 가이드에 따르면 유럽연합에 수출되는 미국 부과되는 관세는 평균 3%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정보를 얻은 것인가? 아마도 요즘 한창 뜨고 있는 트럼프의 무역 짜르(czar) 피터 나바로에게서 제공받은 정보일 터이다.

나바로의 득세와 관련한 뒷담화는 트럼프 행정부가 보스가 원하는 것만을 들려주는 알랑쇠들에게 상을 내리는 곳이라는 특성을 제대로 보여준다.

아첨꾼 나바로는 어떻게 백악관 참모로 기용될 수 있었을까?


현재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활동 중인 사라 엘리슨이 배너티 페어 재직 시절인 대통령선거전 당시 작성한 기사에 따르면 공화당 후보였던 트럼프는 자신의 보호무역주의 견해를 뒷받침 해줄만한 연구결과를 찾아보라고 사위인 자래드 쿠슈너에게 지시했고, 쿠슈너는 아마존을 뒤져 ‘중국에 의한 사망’(Death by China) 이라는 제목의 책을 찾아냈다. 이 책의 공동저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나바로였다.

쿠슈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바로는 2016년 트럼프 대선캠프의 첫 번째 경제자문역을 맡게 됐다. 나바로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긴 하지만 사조의 주류를 이루는 학자들과는 대단히 다른 견해를 지닌 인물이다.

물론 때로는 비정통파에게서 받은 조언이 먹힐 때도 있다. 정통파가 늘 옳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정통파의 견해가 통하려면 조언을 구하는 본인 자신이 열린 마음을 지닌 사색가여야 하며, 반대편의 견해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수용한 견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를 면밀하게 따져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분명 정신 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비주류인 나바로의 견해는 기초적인 개념적, 사실적 오류를 내포한 듯 보인다.

그 중 하나가 트럼프와 유럽의 침뱉기 대결과 직접적인 관련을 지닌 유럽의 부가세(VATs)에 대한 완전한 오해다. 미국은 부가세가 없지만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부가세는 세수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다.

대선캠프 백서에 나타난 나바로의 견해를 예로 들어보자. 백서는 VATs가 유럽의 무역업자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불공정한 이익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유럽에서 팔리는 미국산 제품들은 VAT를 지불해야만 한다. 독일에서 판매될 경우 부가세율만 19%에 달한다. 백서는 이것이 수입관세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반면 미국으로 수출된 독일상품들은 부가세를 물지 않는다. 백서는 이를 수출지원금에 다를 바 없다고 적시한다. 나는 트럼프가 말하는 “지독한 관세”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백서에는 독일 생산업체들이 독일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상품에도 수입품과 마찬가지로 19%의 세금이 부과된다는 사실이 빠져있다.

또한 미국 생산자들이 국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물품에 부가세가 붙지 않는 것처럼, 독일 생산업체들이 미국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상품에도 부가세가 붙지 않는다.

한마디로 미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공평한 관행이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VAT과 교역 상대국의 경쟁력 제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본적으로 VAT는 독일의 소비자들에게 부과되는 판매세에 해당한다. 세계무역기구(WTO)가 VAT를 합법적이라 판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기초적이고 널리 알려진 세금과 무역 관련 조항조차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백악관의 핵심 경제 보좌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내가 이미 지적했듯 보스가 듣고 싶어 하는 얘기만을 골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비열하기 그지없는 알랑쇠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격을 낮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바로가 최근 블룸버그에 쏟아놓은 발언 내용을 들여다보자.

“정말이지 경제전문가로서 나의 역할은 대통령의 직관력을 확인하는 근본적인 분석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대통령의 직관은 이런 면들에서 항상 옳다.”

이 정도면 “와우”(Wow)라는 감탄사가 안 나올 수 없다.

백악관의 보좌관들이 대통령과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고, 공개적으로 그들 두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건 해도 너무했다.

나바로는 자신이 정책분석가가 아니라 선전원이라고 자랑스레 떠벌린다. 그는 단순히 대통령의 편견을 확인해주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선언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속속들이 비미국적인 알랑쇠 역할을 실천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에게 오류란 없다는 식의 선언이 먹혀들게 되었는가?

지금 그 정도는 흔한 일인데 이는 트럼프가 독재자의 본능을 지녔음을 에둘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그보다는 트럼프가 열등한 독재자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정부 안팎의 비판에서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호산나 찬양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게임을 끝까지 해낼 뜻이 없고, 대신 정상적인 민주적 절차를 따르는 게임을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트럼프 행정부에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조만간 트럼프 행정부에는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아첨꾼들만 남을 것이다. 그 끝이 좋을 리가 없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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