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알 만한 사람 다 알았지만…‘괴물’ 폭로 20년 걸렸다

2018-02-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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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나쁜 손’ 공공연한 비밀, 성폭력 묵인 침묵의 카르텔이 문제

▶ ‘발 붙이려면 입 다물어라’ 종용, 연극계 폐단 아닌 우리 사회 치부

알 만한 사람 다 알았지만…‘괴물’ 폭로 20년 걸렸다

연출가 이윤택씨가 19일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성추행 행위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신상순 기자>

문화계 ‘미투’ 파문 확산

‘선생님’의‘나쁜 손’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선생님’이 안마, 발성 지도 등을 빌미로 극단 단원들의 신체를 상습적으로 만진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20년 만에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동료 중 누군가는 성추행으로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선생님’의 권위는 누구도 꺾을 수 없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제라도 폐단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퍼져 나간‘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운동으로‘선생님’은 고개를 숙였다.

■이윤택의 몰락


국내 연극계의 새 경지를 개척했던 거물급 이윤택(66) 연극연출가가 자신이 이끌던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을 20년 가까이 상습 성추행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충격을 던졌다.

이윤택 연출가에 대한 지난 14일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의 폭로로 촉발된 연극계 미투 운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의 실명이 거론된 후 연일 추가 폭로로 이어지고 있다.

2003~2010년 이 연출가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했다는 배우 김지현씨는 19일 페이스북 자신의 계정에 2005년 이 연출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낙태를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낙태 사실을 아신 선생님께선 제게 200만원인가를 건네시며 미안하단 말씀을 하셨다”며 “지금 연희단거리패에 계신 선배님들께선 아마 이 사실을 모르실 거다. 그때 용기 내서 도와달라고 말씀 못 드려 죄송하다”고 했다.

김씨는 “이후 얼마간은 절 건드리지 않으셨지만 그 사건이 점점 잊혀져갈 때 쯤 선생님께서 또 다시 절 성폭행하시기 시작했다”며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아이기에 전 자신의 사람이란 말씀을 하시면서”라고도 털어놓았다.

또 2002년 서울연극제 신인연기상 등을 받은 배우 이승비씨는 19일 페이스북 자신의 계정에 2005년 연극 ‘떼도적’ 주연을 맡았을 때 이윤택 연출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고발했다.

■왜 오래 걸렸나

이윤택 연출가가 1986년 부산에서 창단한 연희단거리패는 자체 극장인 가마골소극장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연극을 만들어 온 한국 대표 극단이다. 연기를 공부하는 배우들은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합숙하며 무대에 오르는 것을 소중한 기회로 여겼다. 성폭력 사건에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연희단거리패 뿐만 아니라 이 연출가 자체가 연극계의 아이콘이었다. 비주류 출신으로 연극계 주류가 된 ‘문화 게릴라’라 신화적 인물로 여겨졌다. 이 연출가는 서울연극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이후 부산 우체국, 한일합섬, 한국전력 등 13가지 직업을 거쳤다. 2년제 방송통신대 학력으로 부산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하다 35세에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이후 놀라운 성과들을 내놓으며 변방에서 중심부로 단숨에 진입했다. ‘오구’ ‘문제적 인간 연산’ 등 한국적 색채를 가미하거나 ‘시민K’처럼 사회현실을 고발한 연극을 통해 동아연극상, 서울연극제, 백상예술대상 등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2005년에는 국립극장 예술감독을 맡았고, 2008년에는 석ㆍ박사 학위 없이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돼 화제가 됐다. 경남 밀양시에 국내 최초의 연극 마을인 밀양연극촌을 만들었다. 이런 입지전적인 이력은 인간 이윤택을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 만드는데 일조했고, 결국 피해자와 주변인들의 입을 막았다.

■연극계 ‘미투’ 확산

익명을 기반으로 한 공연커뮤니티 디씨인사이드 연극ㆍ뮤지컬 갤러리를 중심으로는 또 다른 유명 연출가, 공연 스태프, 배우 등이 행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게재되고 있다.

특히 2001년, 2002년 이윤택 연출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글을 쓴 A씨는 그 이전에 밀양연극촌 촌장을 역임한 인간문화재 하용부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추가 폭로글을 올렸다. 하씨는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오구’ 출연자로,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이기도 하다.

원로 연출가 겸 극작가 오태석도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지난 15일 여배우 출신 A는 SNS에 ”축축한 선생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소리를 지를 수도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앞에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순간 우리는 그들에게 투명인간이었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A씨는 자신의 글에서 연출가의 이름을 ‘ㅇㅌㅅ’이라고 지칭하며 오태석 연출가의 성추행을 암시했다.

이어 B씨 또한 ”‘백마강 달밤에’라는 연극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극단의 뒷풀이에 참석했다. 그 연출가는 술잔을 들이키는 행위와 내 허벅지와 사타구니 부근을 주무르고 쓰다듬는 행위를 번갈아 했다“며 오태석 연출가를 직접적으로 저격했다.

■자성 목소리도

연극은 협업을 바탕으로 한다. 학교에서부터 선후배, 스승과 제자로 얽힌 인적 관계가 현장으로 이어진다. 황이선 연출가는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2002년 대학 재학 시절 연극계 대가로 알려진 교수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술자리에서 해당 교수의 옆자리는 성추행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지만, 학생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이제 막 극단 생활을 시작한 어린 연극인들도 “이 곳에 발 붙이고 있고 싶으면 조용히 하라”는 종용을 거스르기 어렵다.

위계질서가 강력히 작용하는 연극계에서 권위의 상층부는 여전히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신체 접촉과 같은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술자리와 작업 중 이뤄지는 성희롱 정도는 웃어넘길 줄 알아야 일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연극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임인자 기획자는 “남성 중심의 한국 문화는 무대 위 연극 작품뿐 아니라 연극의 창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우리 스스로부터 성찰하고 바꿔나가야 폐단을 끊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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