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북미 대화 등 ‘여건’ 강조

2018-02-20 (화) 서울지사=김광덕 뉴스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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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정부 남북 정상회담 ‘속도 조절’ 배경은

▶ 비핵화 ‘성과’ 없으면 역풍 우려… 지방선거·국내 여론에 영향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 북미 대화 등 ‘여건’ 강조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오후 평창 동계올림픽 메인프레스센터를 방문, 내외신 기자 워크룸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속도 조절에 나선 배경에 촉각이 모아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17일 평창 동계 올림픽 메인프레스센터를 방문해 내외신 취재진을 격려한 자리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우리 속담으로 하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신중하게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것 같다”며 이같이 비유했다. 문 대통령은 또“남북 대화가 미국과 북한과의 비핵화 대화로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신중론은 우리 국민들의 정상회담 기대치를 낮추면서 완급을 조절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0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한국을 찾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의 방북을 요청한 직후부터 남북 정상회담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 ‘여건’과 ‘성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속도 조절론은 우선 정상회담 개최 여건 조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 무게를 둔 것이다. 문 대통령은 김여정 부부장이 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문 대통령을 이른 시일 안에 만날 용의가 있다”며 방북 초청 의사를 전하자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서 성사시키자”고 답했다. ‘여건’을 거론한 것은 남북 정상이 대화 테이블에 앉는데 미국 등 주변국들이 불편해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 두 바퀴가 동시에 굴러가야 비핵화 협상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대표단 단장으로 평창 동계 올림픽을 찾았던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 등을 굳이 외면한 것도 미국이 배제된 채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펜스 부통령은 한국 방문 직후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 지속을 강조하면서도 “북한과 대화 기회가 있다면 미국의 확고한 (비핵화) 정책을 전할 것”이라며 투트랙 입장을 내놨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도 17일 CBS방송 인터뷰에서 “당신(북한)이 나에게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를 귀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북미 대화를 바라면서도 핵 폐기는 할 수 없다면서 버티는 입장이어서 북미 접촉이 탐색 대화를 넘어 비핵화 의제를 다루는 본(本)협상으로 조속히 진전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과 북한의 줄다리기는 문재인정부가 정상회담 가속기를 밟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두 번째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오히려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2차 정상회담 때와 달리 북한이 핵실험을 6차례나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 실험까지 마친 상황이기 때문에 정상회담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북한의 핵 폐기와 도발 중단이 돼야 한다.

범여권 일각에서는 핵 폐기 대신에 더 이상의 핵 개발을 하지 않는 ‘핵 동결’과 추가 도발 중단을 얻어내도 되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핵 동결에 그칠 경우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셈이어서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뿐 아니라 미국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북한은 김정일 76돌 생일(2월 16일)을 하루 앞두고 가진 중앙보고대회에서 ‘자위적인 핵 억제력을 더욱 튼튼히 다지며’를 강조해 핵 폐기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세 번째, 정상회담이 국민 여론과 지방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완급을 조절하는 측면도 있다. 일반적으로 남북 관계가 해빙 무드를 탈 경우 여권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상당히 진전된 상황에서는 비핵화 합의가 없는 정상회담은 여권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과거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도 야당에 유리하게 전개되거나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김대중정부가 2000년 4월 총선을 사흘 남기고 6·15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전격 발표했으나 실제 결과는 야당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또 노무현정부 때인 200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10월 초에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이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로 기울어진 대선 판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리얼미터가 지난 14일 전국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4.4%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결과를 보면 ‘남북 정상회담을 찬성한다’는 의견이 61.5%로 집계됐다. 반면 ‘정상회담을 반대한다’는 응답은 31.2%였다. 남북 정상회담 찬성 의견이 반대보다 두 배 이상 많지만 반대 견해도 30% 이상으로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여건’과 ‘성과’를 점검하면서 내실 있는 정상회담을 추진해야 긍정론을 높일 수 있다. 문재인정부는 숨 고르기를 하면서 북미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한 중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또 대북 제재 완화 논란을 피할 수 있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우선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지사=김광덕 뉴스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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