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라스베가스서 도박 김형욱, 140만달러 거액 잃어

2017-12-17 (일) 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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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말할 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10

▶ ■ 김형욱의 일탈, 재산 조사로 이어지다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청문회의 복병, 구드링 의원
1977년 6월의 첫 청문회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그러나 김형욱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에드워드 더윈스키 의원과 함께 공화당 소속으로 프레이저 위원회에 합류한 윌리엄 구드링(William F Goodling) 의원이었다. 구드링 의원은 처음부터 김형욱에 나쁜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스타 증인’을 청문회의 코너로 몰았다.
“당신, 생계를 어떻게 하느냐?” “미국 올 때 돈을 얼마나 가져왔느냐?”
다분히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형욱의 답변은 좀 궁색하게 느껴졌다.
“한국서 15만 불을 가져왔다. 암시장에서 바꾸는데 2년이나 걸렸다. 몰래 오느라 재산을 다 못 가져왔다.”
15만 달러밖에 못 가져와 어렵게 산다는 뜻이었다.
소수파인 구드링 의원이 건드린 김형욱의 재산 문제는 이 ‘스타 증인’을 궁지로 내몬 전주곡이었다. 프레이저 소위가 이듬해 4월13일부터 김형욱의 재산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물론 김에 대한 재산 조사는 의도된 스케줄은 아니었다. 청문회 이후에 연속된 불미스런 사건으로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김형욱 주연의 ‘일탈 사건’은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8년 1월 개봉됐다. 김형욱이 프랑스를 다녀오다 뉴욕의 공항에서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6만여 달러를 밀반입하다 미 세관 당국에 적발됐다는 것이다.

-양말 속에 6만불 감춰오다 뉴욕공항서 적발
세관 당국에 의하면, 김형욱은 에어 프랑스 편으로 18일 아침 뉴욕의 공항에 내렸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그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찾느라 구부리는데 발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것이 눈초리 매서운 직원에 덜미를 잡혔다. 세관실에 데려가 조사를 해보니 양말 안에서 미화 5만 달러가 튀어나왔다. 트래블러스 체크와 프랑스 화폐 등 총 6만8,670달러가 그의 몸에 숨겨져 있었다.
당시 화폐 신고액은 5천 달러 이상이었다. 통통한 동양의 중년남자가 신고액의 10배가 넘는 거액을 숨겨 들어오자 세관 당국은 그를 세관 유치장에 가두고 기소했다. 김형욱은 세관당국에 돈을 숨겨온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이오. 한국과 미국에서 감시를 당하고 있어 돈을 가져 오면 주목을 받을까봐 감춰온 것이외다.”
뉴욕의 동부지구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김형욱에 언도 유예에 감독 없는 1년간 감청 판결이 내려졌다.


라스베가스서 도박 김형욱, 140만달러 거액 잃어

프레이저 위원장(위). 프레이저위원회 스태프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아래 왼쪽). 스태프들과 운동경기를 하다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안홍균 씨.



-라스 베가스 도박장에서 행패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4월의 아침이었다. 의회 사무실로 출근하니 존 N. 수석 검찰관이 나를 찾았다.
“오늘 일찍 김형욱이 내 사무실을 다녀갔소. 당신과 안 마주치려고 아침 일찍 온 것 같아요.”
김형욱이 존 N. 수석 검찰관을 새벽부터 찾은 용건은 도박을 하다 돈을 잃었다는 ‘자백’이었다.
“라스베가스에서 도박하다 돈을 좀 잃었소.”
수석 검찰관이 김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얼마나?” “백만 불?”
그러자 김형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존 N.은 입을 다물었다.
김이 프레이저 소위를 스스로 찾아와 거액 도박 사실을 털어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시저스 팰리스 호텔의 도박장에서 계속 돈을 잃자 한인 직원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한다.
“한국 분이시죠. 여기는 무서운 곳입니다. 그만 하시는 게 좋습니다.”
손님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동포애로 선의의 조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김형욱은 벌떡 일어나 “네가 뭐야” 하고 소리치며 뺨을 때렸다. 경찰이 달려오고 소동이 벌어졌다.
코리아 게이트의 스타 증인 김형욱 전 KCIA 부장이 라스베가스 도박장에서 거액을 잃었고 직원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사실은 핫뉴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김은 신문 보도가 나기 전에 하원 윤리위를 찾아와 미리 토설하며 방어막을 친 것이었다.

-프레이저위, 김형욱 재산조사 착수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140만 달러를 잃었다. 재산은 15만 불밖에 없다는 그가 1백만 불이 넘는, 당시로서도 거금을 도박으로 날린 것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6만여 달러의 밀반입에 도박사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동선의 서류를 조사해보니 김형욱이 박으로부터 돈을 받은 증거가 나왔다. 박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한 게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여기다 “김형욱은 도둑놈”이란 미주 한인들의 투서도 연이어 들어왔다.
하원 프레이저 소위에서 김형욱의 재산 조사에 착수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사관인 애드 B.가 날 보더니 실실 웃으며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을 다녀와 한국말도 능숙했다.
“얼마 전에 김형욱을 만나 당신의 재산 등 배경조사를 하겠다고 말하니 김이 놀라서 손에 갖고 있던 연필을 부러뜨리더라. 내가 그 연필을 기념으로 갖고 있어.”
그동안 스타 대접을 받다 느닷없이 재산 조사를 한다니 놀라서 연필을 부러뜨린 것이었다.
김은 자신이 추락하고 있음을 얼마 뒤 받은 하원의 소환장에서 확인했다. 78년 7월20일과 8월15일 두 차례 그는 ‘소환장’을 받고 출두해야 했다. 증인이 아닌, 범죄자 취급을 받은 것이다.

-스위스은행에 계좌 개설?
프레이저 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부터 김형욱을 압박했다.
“당신이 처음 증언할 때 한국에서 큰 어려움 속에 15만 불을 가져왔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박동선에게도 돈 받은 게 없다 했는데 박의 회계장부를 조사해보니 16,000달러를 받았더라. 뉴욕 공항에서 돈을 숨겨 들어오다 체포됐는데 스위스에서 찾아온 것이냐?”
당초 김형욱은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 제공한 항공권으로 가족들과 스위스에 먼저 들른 후 자동차 편으로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카지노가 항공권을 제공할 정도로 ‘우수 고객’이었다.
“불란서에 가족들을 데리고 갈 때 미국의 내 증권을 팔아 현금으로 가져갔다. 체크나 크레딧 카드를 쓰기 싫어 현금으로 가져갔다가 돌아올 때 감춰온 것이다.”
김형욱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프레이저 소위에서는 그를 계속 몰아붙였다.
“당신, 스위스 은행에 계좌가 있느냐?” “전혀 없다”
“스위스에 은행 계좌 개설하러 간 것 아니냐?” “한국 정부에서 여권 연장을 안 해줘 입국이 쉬운 스위스에 먼저 간 것이다. 그 다음에 차로 불란서에 갔다.”
“그런데 당신이 뉴욕 공항에서 잡혔을 때 세관원에게 스위스에 계좌 개설하는 거 알아보려 간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렇지 않다”

-박근혜가 보내온 건어물포
프레이저 소위 위원들은 은행 등에서 확보한 각종 자료를 근거로 김형욱에 질문을 쏟아냈다. 김은 동행한 미국 변호사 알렌 싱어를 내세워 반박했다. 그러다 평정심을 잃고 소리쳤다.
“나는 한국에서 집도 뺏기고 재산이 압수당했으며 여권 연장도 안 되고 연금도 못 받는다. 또 궐석재판을 해 반역자 취급을 하고 있다. 난 한국 정부로부터 무서운 협박을, 생명의 위협도 받고 있다. 얼마 전에는 민병권 전 무임소장관이 날 회유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박근혜가 보내온 건어물포도 돌려보냈다. 그걸 감수하며 증언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날 죄인 취급하고 오만하게 조사를 하고 있다. 당신 참모들은 날 악당 취급하고 있다.”
김형욱은 마침내 수정헌법 5조를 인용하며 묵비권 행사를 선언했다.
“오늘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답변을 거부하겠다. 내가 한국에서 뭘 했건 당신 위원회의 권한이 아니다. 한국에서 한 행위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없다.”
고성과 살벌한 기운이 장내를 가득 채웠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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