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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할 때 편리하게 ‘피임약 자판기 속으로’

2017-10-17 (화) 한국일보-뉴욕타임스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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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 비싸 일반 약국선 잘 비치 않아

▶ 남의 눈치 안보고 저렴하게 구입 인기

필요할 때 편리하게 ‘피임약 자판기 속으로’

UC 데이비스에 응급피임약 플랜 B의 벤딩 머신을 설치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본교 졸업생 파르티크 싱. [사진 Parteek Singh]

필요할 때 편리하게 ‘피임약 자판기 속으로’

사후피임약 플랜 B. 성관계 후 24시간 내에 먹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 캠퍼스내‘모닝애프터필’판매

사후피임약(morning-after pill)을 구입할 수 있는 나이 제한이 철폐된 지 4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젊은이들이 이를 구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국의 대학생들은 모닝 애프터 필을 비치한 벤딩 머신을 교내에 설치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실제로 설치에 성공한 사례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UC 샌타바바라와 UC 데이비스는 올 들어 ‘웰니스’ 머신을 설치해 뉴스가 된 바 있다. 이 벤딩 머신에는 플랜 B(사후피임약 이름)의 제너릭 브랜드와 임신 테스트기, 여성 위생용품, 애드빌 등의 진통제 등이 갖춰져 있다.


머신 설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UC 데이비스의 졸업생 파르티크 싱은 30개 이상의 대학들로부터 자기네 캠퍼스에도 설치하고 싶다는 문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UC 데이비스는 지난 4월 벤딩 머신을 설치했는데 지금까지 응급피임약 50개가 팔렸을 정도로 이용도가 높다고 전한 싱은 “이제 시작이며 전국에서 큰 반향이 잇달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모닝 애프터 필은 피임약에 들어있는 합성호르몬을 고용량 함유한 약으로, 난소에서 난자가 배출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임신을 방해하는 작용을 한다. 흔히 ‘낙태약’으로 불리는 미페프리스톤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유산을 유도하는 미페프리스톤과는 달리 사후피임약은 이미 난자가 자궁에 착상했다면 임신을 끝낼 수는 없다. 따라서 피임하지 않고 성관계를 나눈 후 24시간 내에 복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이다.

플랜 B와 제너릭 약은 현재 오버더 카운터로 살 수 있는 약이지만 드럭스토어에서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다.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내놓고 팔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현재 약국에서 플랜 B의 평균가격은 50달러, 제너릭 버전은 40달러 정도다.

많은 대학들이 헬스 센터 내에 이 약을 갖춰놓고 있긴 하지만 양호실의 오픈 시간이 짧고 주말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학생들은 정작 필요한 때 약을 구할 수 없다고 불평하고 있다. 벤딩 머신을 들여놓아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학생들 스스로 고안해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UC 대학들을 모델로 한 피임약 자판기 설치 계획을 발표한 바 있는 스탠포드 대학은 이번 쿼터의 시작과 함께 마이 웨이(My Way, 플랜 B의 제너릭 이름)를 25달러에 판매하는 머신을 설치했다. 이를 위해 거의 3년 동안 애써온 스탠포드 졸업생 레이첼 사무엘스는 자기 남자형제가 다니는 남가주 포모나 칼리지에서 비슷한 머신을 들여놓는 일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극받아 이 일을 추진했다.

스탠포드의 헬스 센터 약국에서도 플랜 B를 팔고 있지만 주말에는 문을 닫는 것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사무엘스와 일단의 학생 그룹은 2015년 초부터 재학생들을 상대로 응급피임약을 보다 쉽게 구하기를 원하는지 파악하는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어떤 학생들은 약국이나 학교 헬스 센터를 찾아가는 일이 당혹스럽고 스트레스가 된다고 말했고, 헬스 센터의 운영시간도 짧은 것이 문제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무엘스의 한 친구는 사후피임약을 사러 CVS, 월그린스, 타겟 등지를 한참 돌아다니고 나서야 약을 구할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2016년 학생회 간부였던 사무엘스는 응급피임약 벤딩 머신 설치를 최우선 과제로 상정했다. 그 결과 학생회는 대학 당국과 협상을 통해 머신의 비용을 양측이 반반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했고, 마침내 올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플랜 B 벤딩 머신을 처음 들여놓은 대학 중에는 2012년 펜실베니아의 시펜스버그 대학이 있다. 당시에는 17세 이상의 여성만이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었으나 바로 다음해 FDA는 나이 제한 규정을 폐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약의 판매 규정에 대해 많은 혼돈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프린스턴 대학 연구원이며 미국응급피임학회 디렉터인 켈리 C. 클리랜드는 지난 5월부터 학회에서 약국들을 대상으로 모닝애프터 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왔다. 22개주의 133개 약국을 방문해 조사한 초기 데이터에 따르면 41%가 플랜 B나 제너릭 버전을 진열대에 갖춰놓지 않고 있었다. 그 약을 진열할 적절한 자리조차 없다는게 클리랜드의 지적이다.

약국의 방문 조사자 3분의 1은 그 약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ID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22%는 나이 제한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둘 다 사실이 아닌데도 말이다. 지난 6월 소아과학 저널에 실린 또 다른 연구에서는 조사자들이 900여개의 약국으로 전화해 문의했는데 이중 83%는 구입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고 8%는 어떤 상황에서도 구입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연구의 공동 저자이며 샌디에고의 약국 내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샐리 라피는 벤딩 머신을 지지한다면서 상담할 기회도 없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애초에 원치 않는 임신일 경우 상담도 필요 없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보이즈 주립대학의 재학생 헤이든 브라이언(19)은 익명으로 사후피임약을 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학교 당국에 응급피임약 벤딩 머신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누군가 사람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서 프라이빗하다”고 말한 그는 또한 “대학은 약국들만큼 이윤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하다”고 장점을 설명했다. 학교 측에서도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브라이언의 이야기다.

<한국일보-뉴욕타임스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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