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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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 칼럼:가을 투정

2015-10-01 (목)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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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 여름의 기운이 다 소멸되었다. 쌀쌀해진 날씨에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이슬 맞은 자동차 와이퍼를 흔들며 일터로 향한다. 조금은 이른 아침거리엔 아직도 밤기운에 젖은 안개가 차를 향해 밀려와 부서진다. 안개를 밀어낸 햇살이 내릴 때면 이 거리도 다시 분주해 질 것이다. 누런 열쇠로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 빨간 불이 들어오는 네온의 줄을 아래로 당겨 오픈사인을 만인에게 알린다.

형광등 전원을 차례대로 올리고 ,한결 같이 제자리를 지키고 혼자 떠드는 라디오 볼륨을 키운다. 그리고 카운터 컴퓨터에 키보드의 엔터를 한번 찍고 기초화면을 점검한 뒤에 코끝에 돋보기를 걸치고 거울 앞에서 화장발을 확인하면 손님 맞을 준비가 완료된다.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되어 쌓아온 시간만큼 숙달된 행동이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움직이는 마치 숨을 쉬고 있는 로봇이 된 느낌이다. 여느 때라도 항상 똑같이 그렇게 해왔는데도 오늘은 유독 일상의 틀에 박힌 내 모습을 문밖으로 내몰고 싶은 이유 없는 할퀸 마음이 툼벙거린다.


지난 밤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좁은 공간을 스캔하다가 책꽂이에 다가가 친숙한 책 하나를 빼어 들었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글과 시, 한밤에 선율이 감미로웠던 포크송의 가사, 어설프지만 드문드문 그려 넣은 삽화, 질풍노도 같던 이십대 초반에 끼고 살던 나의 일기책이다.

두꺼운 황금색 표지에는 “마이웨이”라는 영문인쇄가 아직도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고요를 뒤집어쓴 밤에 불빛 하나만 세우고 한장 한장 넘기다 보니 그 시절의 생각들과 감정이 되살아나 쿵닥거리는 가슴과 회유할 수 없는 무수한 기억들이 새벽안개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한다.

시간 위에 군림하고 당당했던 시절이 아쉬움과 갈망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미완의 시로 남아 아직도 사념의 울타리를 배회하는 못 다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써 내려 가고 싶다.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숨표를 찾아 까맣게 밤을 헤매다 시리도록 눈부셨던 기억의 가을 속으로 젖어 든다. 오는 길도 모르고 가는 길도 모르고 방황하던 낙엽 한 조각이 숨 한번 고르더니 어깨 너머로 홀연히 사라졌다.

낙엽이 쌓이기 시작하고 소낙비에 젖은 낙엽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서있는 저 나뭇가지 위에서 불꽃처럼 타들어 가는 잎새되어 설치고 나온 아침을 눈부신 자태로 마중한다. 비올라 음색보다 더 애절한 소리로 가을이 흐르고 이별을 위한 사랑은 다시 시작 되어 한잎 두잎 그리움을 털어 내려 한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물들어 노래하고 별같이 아름다운 시 하나를 또 탄생하려는가. 진하게 내린 커피 한잔으로 머리를 깨우고 나의 시간은 다시 마술사의 손처럼 분주해 진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같이, 우연으로 이야기 되지 않는 삶의 언저리에서 나도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연약한 몸으로는 한 치도 대항할 수 없기에 자연의 섭리라는 오묘한 진리로 예쁘게 포장을 하고 위로를 받는다. 삶이 사랑이 되어도 늘어 가는 세월의 두께 만큼 나눌 수도 덮을 수도 없기에 아쉬운 또 다른 사랑은 그리움으로 가슴에 두기로 했다.
가을이니까.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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