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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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극동통운(Far East Forwarding Inc) 김의만 대표

2015-10-01 (목)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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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세사로 40년 외길...“고객.가족 덕분이죠”

▶ 어릴적부터 부자의 꿈

한국수출 붐타고 통관회사 필요
관세사 자격증 따고 회사 설립
요구르트 추가관세.김 영양표시 문제 등
해결 기억에 남아

관세사로 40년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 한인이 있다. 그는 관세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있다. 큰 돈벌이는 아니지만 남을 돕는 일을 좋아한다. 은근과 끈기로 한 우물만 파고 있는 이유다. 그를 찾는 고객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꾸준하다. 그의 실력과 풍부한 경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직과 성실’이란 경영철학이 그의 장수비결인 셈이다. 극동통운(Far East Forwarding, Inc) 대표인 김의만(76) 관세사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6.25 전쟁이 낳은 부자의 꿈
그는 1939년 서울 연지동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맞았고, 초등학교 5학년 땐 6.25 전쟁이 터졌다. 그래서 어머니 고향인 충남 보령군 남당리 두메산골의 할머니 댁으로 피난 갔다. 2년간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너무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 때부터 그는 ‘돈을 많이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학교공부에 전념했다.


1960년 선린상업중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를 열심히 했다. 반에서 1, 2등은 그의 몫이었다. 6년 동안 개근도 했다. 숭실대학에서는 더욱 학업에 진력했다. 교수회 장학생으로 등록금을 면제 받았다. 매월 학교에서 기숙사 비용도 받았다. 경제학과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입사해서는 영업, 생산, 관리부 등에서 일을 했지만 회사를 그만 두었다. 6.25 때 겪은 심한고생으로 무역회사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신방직 외자부에서 수출입을 담당할 수 있게 됐다. 그곳에서 수출입 업무를 맡아 외환 은행, 상공부, 경제기획원, 관세청 등을 다니면서 많은 일을 배웠다.
그는 “그 당시 일신방직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그는 1973년 아내, 자녀 3명과 함께 미국에 이민 왔다. 연고 없는 LA 공항서 영주권을 받고 바로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해 맨하탄 할리데이 인에서 첫날밤을 보내야 했다.

그 후 플러싱에서 월 렌트 300달러의 원 베드룸 아파트를 얻어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곤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직장 없이 생활비만 축나고 있어 빵공장을 찾아갔지만 그마저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수출입 업무에 관한 일자리가 나오는 뉴욕타임스 일요일 판을 보고는 수 차례 전화를 했지만 역시 일자리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만 보내다 맨하탄 다운타운의 미국 대형 통관회사인 Lugi Serra Inc에서 일을 하게 됐다. 3년 정도 그 곳을 다니다 1976년 통관회사를 직접 설립했다.

그는 “막상 이민 와서 보니 할 것이 없고, 평생 직장생활로 막노동을 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수출입 경험자를 구하는 통관회사에 입사했다. 그 곳에서 영어로 인한 불편을 겪다가 한국제품을 취급하는 통관회사를 직접 차리게 됐다”고 말한다.

■관세사는 나의 천직
그는 한국정부의 수출정책으로 한국제품(Made In Korea)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한국물품을 통관할 의욕이 생겼다. 그래서 미국 통관회사에서 배운 경험을 토대로 1976년 미 항만청과 미 재무성에서 해상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FMC License와 관세사 자격증(Customs Broker License)을 각각 취득했다. 그리고 맨하탄 다운타운인 150 Broadway에 극동통운(Far East Forwarding Inc) 통관회사를 설립했다. 매일 회사 근처인 6 World Tread Center에 있는 세관건물에 다니며 편하게 세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주 고객은 한국에서 물건을 수입하는 한국의 지상사, 맨하탄 32가 브로드웨이 한인도매상인과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한인들이었다. 그러다 한국 지상사와의 거래는 끊겼고 한인 기업으로 의류, 식품, 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한인들과는 신뢰를 바탕으로 꾸준히 거래를 하고 있다.


그는 보통 통관회사에 없는 자체트럭을 구입, 세관이 끝나면 작은 화물이라도 신속하게 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 처음 구입한 4대의 가솔린 중고트럭이 잦은 고장을 내 고생도 많이 했다. 그 후 10년 지나 디젤트럭을 구입해 문제를 해결했다. 무엇보다 정직하고 성실한 운전기사를 만나서 그와 30년 동안 함께 일을 했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일을 잘한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지금도 은퇴한 그가 가끔 파타임으로 일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감사하고 있다.

그는 관세사로서 세관과 미식품의약국(FDA)의 문제들을 해결할 때 보람을 느낀다. 그 중에서도 새우젓 투매방지관세 추징, 요구르트 추과관세, 한국 김 영양표시 정정에 대한 FDA 거절 등을 해결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어느 한 회사의 문제가 아니고 동종업계의 전체 수입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결국 실력과 풍부한 경험이 있는 통관회사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같은 업종의 다른 회사도 이득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1999년 공항근처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맨하탄 다운타운에 사무실이 있을 때는 JFK 공항 항공화물의 서류를 받아서 통관하기에 시간적으로 불편했지만 지금은 세관과 온라인으로 돼있어서 항공화물이나 선박화물이나 동시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9.11 월 트레이드 센터 폭발하기 2년 전에 사무실을 옮기지 않았으면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었기에 미리 이전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인 고객들 중에는30, 40년 또는 회사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꾸준하게 거래하는 분들이 있다. 어떤 고객은 서로 만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거래를 하지만 서로간의 신뢰만큼은 아주 두텁다. 너무나 감사하고 잊지 못할 고객들이다”면서 고객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신앙 속으로
그는 뉴욕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의 권유로 퀸즈장로교회에서 2년 동안 성경공부를 했다. 경제학 서적만 보던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것도 깨달았다.

예수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어서 뉴욕신학교(New York Theology Seminary)에 다녔다. 1996년과 1999년 신학석사와 목회학 박사를 각각 취득한다. 2003년에는 미 연합감리교단에서 부목사로 인준됐다. 2009년에는 LA의 한독선연(KAICM)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대표 및 안수위원을 맡았다.

그는 1999년 9월부터 2015년 6월30일까지는 뉴욕신학교 교목을 맡아, 매년 코리안 퍼레이드에 학생들과 참여해 한인사회에 뉴욕신학교를 홍보하기도 했다. 그는 후러싱제일교회를 30여년 다니며 경조부에서 무궁화동산 묘지 분양을 담당했다. 특히 지역선교부장으로 매주 토요일 새벽 예배 후에는 교회근처에서 남미의 일일노동자들에게 12년 동안 커피와 도넛을 나눠주는 봉사도 했다. 지금은 뉴욕 모자이크 교회에서 협동목사로 봉사하며 교회 내 노아대학의 학장을 맡고 있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회사 일은 열심히 했다. 그러다보니 참 가족에게는 미안하고 그저 책만 보면서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인생은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배운 것을 남과 같이 나누며 살고 싶다. 또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많이 가져야 겠다”고 말한다.

■소중한 가족
그는 30세 때 간호대학과 약학대학을 나온 아내와 중매로 결혼했다. 그 동안 함께 살면서 자신의 건강을 지켜주고 어려울 때 용기를 준 아내에게 늘 고마워한다. 그러면서도 늘 미안하다. 이민 와서 아이들이 너무 어려 인턴과 약사시험을 볼 수 없어 아내의 전공을 살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둘째 아들과 그의 아내가 함께 약학박사가 되면서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뤘다. 막내 딸 역시 마운트 사이나이 빈센트 칼리지 간호 대학원 석사과정을 일등으로 졸업해 어머니에게 큰 기쁨을 주기도 했다.

큰 아들은 경제학과를 졸업해 장남답게 아버지와 함께 통관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특히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서울에서 1971년과 1973년에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각각 최고 우량아로 선발, 어렸을 때부터 건강미를 자랑하기도 했다. 자기 일을 잘 마쳤을 때를 행복이라 생각하는 그는 열심히 하는 일이 인생이며 협조하는 일이 결혼이며 남은 돕는 일이 관세사라고 한마디로 표현 한다.

그는 “살기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그러다보니 아내의 전공을 살리지 못한 것과 자식들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게 아쉽다. 이제는 아내와 자식들에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살아야 겠다”며 가족의 소중함을 거듭 강조했다.
chyeon@koreatimes.com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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