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갑헌 (맨체스터대학 철학교수)
요즈음처럼 한국말이 혼란한 때에 비판과 비난을 구별해 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비판이나 비난이나 그게 그거지, 뭐 그런 것을 구별해 쓸 필요가 있을까? 말이란 편하게 쓰면 그만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언젠가 교육받은 사람이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글을 쓴 일이 있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의 반응은 세상만사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과 함께 말이 변하고 그 뜻이 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변화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니 할 수 없다는 생각보다는 변화하는 것을 잘 인도하고 다듬어 더 좋고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공자님도 천하의 혼란이 말의 혼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말의 혼란을 바로 잡아야 평화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과 같다.
지난 주간에 몇 한국 분들과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에, 왜 한국의 야당 사람들은 무조건 대통령을 ‘비판 (批判)만 하느냐’고 언성을 높이는 것을 들으며 비판이야 야당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의도는 ‘왜 무조건 비난(非難)만 하느냐’였을 것이다. 우리말에 비난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 공격하는 것을 뜻한다. 별로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상대방을 헐뜯기 위해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비판’이라는 우리말은 사실 전혀 다른 뜻이다. 비판이나 비난이 모두 한자에 기초한 말이기에 이를 한자로 써보면 그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비판이라는 단어의 뜻을 국어사전은 “사람과 사물의 가치, 능력, 정당성, 타당성 등을 검토해서 평가하는 것을 뜻하며, 사물의 의미를 밝혀 그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합리적이고 개관적으로 검토하고 판단하는 것이 비판이란 말의 참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박근혜대통령이 중국의 항일전승 70주년 행사에 참가했다. 오랜 고심 끝에 가기로 결단했다고 한다. 참가하기 전에는 국익을 위해 꼭 참가해야 하는데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더니, 참가하고 나니 피 흘려 싸우던 적국의 전승 행사에 참가했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어지럽다.
엄격하게 방문의 공과 득실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평가해서 비판하는 것은 야당 여당 모두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해야 할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비난을 퍼부어대는 못된 습관은 국가와 국민을 다 헐뜯는 것임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힘을 들여 이란과 핵무기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고생했다고 칭찬하는 목소리 보다는 잘못된 협상이라는 보수진영의 비난이 요란하다. 협상이란 서로 주고받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란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주지 않고 미국과 서방 열강이 원하는 것만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미국의 진보 자유주의 진영과 언론의 모습 또한 별로 아름답지 않다. 다시 시작된 냉전의 근원이 모두 러시아의 푸틴(Putin) 대통령에게 있는 것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비난하는 것을 바라보며, 이 분들이 객관성과 합리적인 판단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우크라이나 사태나 중동에서 벌어지는 큰 비극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의 개입이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는지 스스로 비판해 보아야 할 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참된 비판의 기준이 된다면, 상대방을 무조건 싸잡아 비난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비난의 홍수 속에 올바른 비판정신이 휩쓸려 가는 것을 경계한다. 말을 바르게 가려서 하는 것이 천하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