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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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 칼럼: 가을이 오기전에

2015-08-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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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전 한인회 회장>

어느날 보다 분주했던 하루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고 동이 트는 것을 보고 겨우 잠이 들었다. 얕은잠 속에서 나 홀로 어느 익숙한 산 등성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 여름 임에도 숲을 흔들고 지나온 바람이 등줄기에 맺힌 땀을식혀 주어 상쾌했다. 그것은 꿈결에도 느낄 수 있는 치유였고 위로 였다.

머리맡에 놓인 김훈의 ‘자전거 여행’ 을 보고 지난밤에 내가 그 치유의 여행을 떠난것을 알았다.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가고 있었고 지난밤 나 홀로 간이역에서 서성였음을알겠다. 브라인드를 반쯤 올려 창밖 너머의 세상을 본다. 뒷뜰에 서 있는 자작나무 잎의 끝자락이 눈에 띄게 빛을 잃었고,그 뒤로 오늘의 해가 눈부시다. 다시 아침이다.


자연계에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 삶에도 사계절이 있을 것이다. 자연계의 사계절에 각각 그 특성이 있는거라면 우리 인생의 계절에도 그 나름대로 특별한 감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각자가 느끼는 생의 봄과 여름, 또 가을과 겨울이 다르겠지만 내가 맞은 오늘이 가을을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자연속의 여름이 열매의 계절이면 인생의 여름 또한 결실을 위한 준비를 했어야 했다.

겨울을 맞기 전에 새로운 적응의 계절이 가을이라면 마주한 현실을 받아 들이며 스스로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산과 들에 있는 각종 식물조차 그들 나름대로의고유한 열매와 색깔을 내보이며 봄과 여름에 잘 구분되지 않았던 고유성을 드러내는데, 내가 사는동안 욕심껏 움켜 쥔 손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두렵기까지 하다.

유럽의 어느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 어느날 중년 부인이 찾아와서 자신이 겪는 우울증의 고통을 털어 놓았다. 부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의사는 그녀에게 일주일 분의 약을 지어주면서 그녀가 지켜야 할 한가지 원칙을 함께 처방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약을 먹으면서 하루에 한가지씩 반드시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서 의사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일주일 후에 부인은 아주 밝은 얼굴로 의사를 찾아와서 자신의 병이 다 나았다고 약의 효과에 감탄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자신이 처방해준 약은 소화제에 불과하며 그녀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은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인생의 가을을 보다 풍성하게 살아가는 지혜는 삶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 두는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계절을 후회없이 완전하게 향유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현재 자기가 있는 생의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넘어 설 때는 후회나 두려움이 있으리라.

눈을 돌려 내가 사는 세상을 본다. 날마다 무슨 특별한 일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눈을 떠 아침을 맞는 일에 설레이고, 비록 더 무거워진 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올 지라도 그 하루하루를 쌓아 나이테를 만드는 일에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인생의 변방에서 미명의 아침을 맞을 지라도 오늘 일어나고 있는 모든일이 특별하다고 마음 먹기로 한다.

김훈은 그의 글 ‘자전거 여행’ 에서 선박을 움직여 대양을 건너가는 항해사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만 목적지의 항구에 닿을 수 있다’ 고 했다. ‘지나간 모든 위치는 무효다’ 라고 한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아야만 가야 할 목적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 오기전에 내 생의 좌표에 새로운 방점을 찍는다. 단순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감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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