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순에도 일.봉사로 바쁜 ‘한인 간호사들의 큰언니’
플러싱 병원 근무시 한인의료상담소 개설 주민건강 보호
전문진료 간호사로 개업, 한인 환자들과 인연 이어가
바쁜 중에도 베이사이드 성당.노스쇼어 병원서 무료 진료
뉴욕일원 1,300여명 한인간호사 큰언니인 최송자 전문진료 간호사, 그는 대뉴욕한인간호협회의 역사를 만들었다. 커리어우먼, 사회봉사,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그의 이민사를 듣는다.
▲일하며 봉사하며
미국 병원이나 진료소에서는 의사 업무의 일부를 대신 해주는 석사학위를 가진 너스 프랙티셔너( Nurse Practitioner)가 환자를 보고 치료를 하는 것이 익숙하다. 한국어로 전문진료 간호사인 NP는 1960년대부터 양성되어 현재 전문진료 한인간호사가 100여명 정도다.
대부분 병원에서 일하나 현재 유일하게 개업 중인 최송자 전문진료 간호사, 그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과거 20년이상 플러싱 병원 간호사로 있을 때부터 알던 이들이다. 한인무료 건강진료시 도와준 이들도 많다.
“18세부터 96세까지 내게 오는 환자들은 다 나를 믿고 오는 분들이다. 고혈압이나 당뇨같은 만성병 관리, 엑스레이나 피 검사를 비롯 모든 검사를 오더하고 결과를 체크하고 후속 진료 등을 꼼꼼하게 체크해 주니 다들 좋아한다.”
가정의학과 주치의의 일을 하는 그는 환자와 사적 상담까지 하면서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인들이 비즈니스를 하느라 바빠서 병을 키운 다음에야 병원에 오는 분들이 많아 안타깝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화사한 미소로 환자를 맞는 그는 요즘 플러싱 루즈벨트 의료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월요일~목요일까지 주 20시간 일한다. 매달 세 번째 일요일에는 베이사이드 성당에서 무료진료, 매달 세번째 월요일에는 플러싱 노스쇼어병원 4층에서 무료진료를 하는데 무보험 저소득층, 연변에서 온 환자, 최근에는 한국말 통하는 의사를 찾아 탈북인들이 찾아온다.
▲차근차근 기반 닦다
1943년 전남 광주 송정리에서 3남3녀의 막내딸로 태어난 정송자(남편 성따라 최송자)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언니 둘은 이화여대 의대와 정외과를 다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막내는 부모님 옆을 떠나지 않고 함께 농사짓고 집안일을 하다가 나중에 우석대 간호학교에 들어갔다.
워낙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성격인지라 69년 졸업 후 우석대 병원에 취직됐고 바로 수술방에 투입됐다. 이후 4년제인 고려대학교에 편입하여 조교로 있으면서 71년 졸업, 76년까지 모교에서 산부인과 간호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한국교육개발원에 근무하던 남편 최종진씨가 미국 플로리다 연수를 다녀오면서 함께 미국에 갈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막내딸을 비행기에 태워 보낸 후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였다. 2년을 울었다. 자리를 잡으면서 매년 휴가때마다 한국에 가서 부모님 옆에 있다 오곤 했다.”
최송자는 1976년~1980년 플러싱 매너 너싱홈에서 일하다가 1980년부터 플러싱 병원에서 일을 했고 남편은 이민 석달만에 브루클린에서 잡화상을 열었다. 부부는 플러싱 아파트에 살면서 전철을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고, 병원 근무를 했다.
조그만 가게에서 시작하여 그 옆 건물을 사고 차근차근 이민의 기반을 닦았다. 나중에 소셜 워커로 15년간 일한 남편은 아내가 맡은 간호사협회 뉴스 레터 편집을 하는 외조를 했다.
▲한인과 지역사회 봉사활동
최송자는 “내 라이프 중 12년간 가장 엔조이 했던 시간”이라 할 정도로 플러싱 병원에 있으면서 한 한인과 지역사회 봉사 활동은 눈부시다.
한인 이민자의 통역은 물론 1988년 11월 16일 플러싱 병원내에 한인의료상담소를 개설, 병원내의 한인 의료인들을 동원하여 일요일마다 무료 진료서비스를 제공하고 플러싱 주민 건강교육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대학과 교회의 크고 작은 모임에 초대되어 무료 건강교육도 했다.
특히 1992년~1999년 미국 암협회 후원으로 ‘I can Cope’ 라는 암환자들을 위한 한국인 서포트 그룹을 만들고 정기적인 모임을 결성했다. 많은 암 환자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플러싱 병원내에 간호학교가 생기자 간호학 교수로써 후배들의 미국간호사국가시험(RN) 리뷰를 도와주고 취직도 많이 시켜주었다.
1976년 이민 온 이듬해 아이 셋까지 다섯 식구가 사는 자그마한 아파트 거실에 갓 이민 온 간호학과 후배이자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살기도 했다. 비좁은 공간과 넉넉지 못한 살림 속에서도 간호사 자격증 시험공부를 하는 후배 뒷바라지를 한 것이다.
더구나 1981년 재미동부지역 한인간호사협의회가 발족되며 제1대 회장으로 홍옥순씨가 추대되고 최송자는 부회장으로 일을 도맡아 했다. 1982년 10월 제1회 한인간호사 주소록 발간, 1985년 5월 첫 한인간호사협회 뉴스레터 발행((1985년 6월 재미간협뉴욕지부와 재미동부지역 한인간호사협의회가 통합하여 뉴욕한인간호협회 설립), 1994년 10월 제1회 뉴욕한인간호사의 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그가 있다.
“82년 플러싱병원에서 연례헬스케어 무료진료를 한 것이 시초이고 1985년 10월 뉴욕개업의협회 주최, 뉴욕한인간호협회 후원으로 한인무료건강진료 행사를 시작했다.”
최송자는 1993~1996년 제7대와 8대 회장을 하면서 1995년 10월부터는 개업의협회와 한인간호협회 공동주최로 무료의료봉사를 하게했다. 최송자는 1992년 내셔널 아메리칸 캔서 소사이어티, 1994년 플러싱 하스피탈 메디칼 센터가 주는 상은 물론 간호협회 공로상, 고려대학교 리더십상 등을 받았고 2005년 고려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간호대학 학술대회 초청강사로 발제강연을 하기도 했다.
▲가장 보람있어
1995년 플러싱 병원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와중에 아델파이 유니버시티에서 전문진료 간호사 공부를 했고 석사학위와 자격증을 받은 후 플러싱 병원 NP 코디네이터로 근무했다.
“나이 50이 넘어서 전문진료 간호사 공부를 했기에 스토니브룩, 몰리이 칼리지 등의 간호대학원생이 연수 기회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 가능한 후배들의 개인 지도를 해준다.”
최송자는 2002년 10월 30일 플러싱 병원에서 정년퇴직한다. “미국에 와서 열심히 간호사로 일했고 남편이 비즈니스를 하면서 틈틈이 세 아이를 돌봐주었다. 아들 셋이 엄마가 성실하게 평생을 일해와 우리가 게으름을 펼 수 없었다, 존경한다고 말했을 때 내 삶이 가장 보람 있었다.”
돈이 모자란다 싶으면 오버 타임 병원 일을 했고 학원 한번 못 보냈지만 세 아들은 잘 자라주었다. 현재 장남 존은 보스턴에서 치과의사이고 차남 데이빗은 영국 런던에서 펀드 매니저로 유명하며 막내아들 어네스트는 메디칼 분야를 공부 중이다. 손자 둘, 손녀 하나가 있다.
최송자는 범생이 소녀처럼 보이지만 타고난 명랑한 성격에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보니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남들 눈에 어려워 보이는 일도 그에게만 넘어가면 즉각 해결이 된다.
▲앞으로도 이렇게
“은퇴해도 될 나이지만 일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말 안듣는 환자도 있지만 환자들과 대화하는 것이 즐겁다. ”
오는 가을부터는 대뉴욕한인간호협회 이사장을 맡는다. 9월에는 그리스 여행 계획이 있는 그는 일하며 봉사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고 좋단다.
전문직 간호사로서 한 길을 똑바로 걸어왔고 현재 전문진료 간호사로 일하면서 후배 간호사들의 ‘귀감(龜鑑)’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최송자,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수많은 한인 암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아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