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사람사는 이야기/ 이코노보험 박명근 대표

2015-08-20 (목)
크게 작게

▶ 위기에 처한 고객 돕는다는 사명감으로 30년 한길

“정직과 성실 경영철학...직원들에 실적 강요 안해”
모교 후배들에 해외인턴십 제공 미 기업문화 체험 기회
올 11월선거 공화당 시의원 출마, 지역주민 대변 최선

30년 가까이 보험업계에 몸담고 있는 이코노보험 박명근(63) 대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 일을 한다.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순수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대가나 보상에 앞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후회나 미련 없이 최선을 다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그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삶의 철학이 바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기 때문이다.


시인, 교수, 보험인


그는 1953년 경남 지리산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봄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가을이면 1km에 달하는 동네입구에 한들한들 피어 있는 코스모스 길이 있었다.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읊고 다니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 4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진주 남중학교와 대아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인하대학교에서 무역학과를 다녔다. 군부독재 시절 대학 학보사에서 기자활동을 하던 그는 삶에 대한 현실성을 깨닫게 됐다. 시인의 꿈이 대학교수로 바뀐 이유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학교 행정직 근무를 3년 정도 했다. 미국 유학을 위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1984년 University of Detroit 에서 MBA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교수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아내가 불법취업으로 이민국에 강제체포, 수감된 것이다. 아내의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와 경재관계에 있던 가게의 한인이 고발한 것이다.

아내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신도 이민국 창살 너머에 있던 아내를 보면서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기필코 미국 땅에서 꿈을 마저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MBA 공부를 마쳤다.

하지만 대학교수의 꿈은 더 이상 꿀 수 없었다. 박사학위보다는 영주권 취득이 우선인 현실을 감안해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그는 대학교수의 꿈을 접고 보험업계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영주권이 필요한 상황에서 뉴저지 뉴잉글랜드라는 종합금융사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최선의 서비스. 정직, 성실

그는 영주권 스폰서를 해 준다기에 투자전문회사인줄 알고 뉴잉글랜드에 취업했다. 그러나 뮤추얼 펀드 등의 금융과 보험 상품을 다 취급하는 종합금융사였다. 그래서 그 때부터 보험을 접하게 됐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고객의 사망보상금을 전달했다. 그 때 보험이 꼭 필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타인의 불행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보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그가 필요로 했던 영주권은 정말 운 좋게도 1년도 되기 전에 취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5년 정도 일을 했다. 그러다 지인들과 뜻을 모아 1992년 9월 맨하탄에 이코노 보험사를 개업했다.

현재는 뉴욕, 뉴저지 2곳에서 사무실을 두고 단독 대표로 운영하고 있다. 한인기업체와 지상사, 자영업자들을 대상으로 종합보험과 직원복지를 위한 단체보험, 연금 등을 취급하는 종합보험 에이전시로서 2,500만 달러 정도의 연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경영철학은 최선의 고객서비스다. 고객 한명 한명에게 최선을 다한다. 직원들에게는 최대한 자율성을 준다. 그 바탕에는 정직과 성실이 깔려 있다. 현재까지 금융사고가 없었고, 재 계약률이 95% 이상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그는 정직하지 않게 가입시킨 보험은 차라리 인연을 맺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전문적인 자문을 무시하고 보험료를 줄이기 위해 왜곡된 정보를 기입 해달라는 고객이 제일 난감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보험관행이 여기와 많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자꾸 한국식 막무가내 서비스를 요청 받을 때 가장 힘이 든다고 귀띔한다.

고객들과의 신뢰와 믿음을 장수비결로 여기고 있는 그는 언제나 위기에 처한 고객 편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보험업계의 매력으로 꼽고 있다.

그는 “실적목표를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오늘 최선을 다하라고 한다. 그 목표라는 것이 직원들을 피곤하게 하고 때로는 엉터리로 실적을 채우기도 한다. 그 것이 바로 클레임 발생 시 커버리지가 거부될 수도 있기에 지상 최대의 성장목표 보다는 기존고객들에게 전문가 답게 서비스하고 천천히 다져 나가는 자세가 보험운영의 최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고 정직과 성실을 강조한다.

좋아서 하는 일

그는 네트워킹을 위해 지난 2011년 뉴저지 경제인협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전임회장이 갑자기 물러나서 얼떨결에 회장직을 맡게 됐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즐겁게 수행해 오고 있다. 봉사라는 명분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경협이 120여명의 회비를 내는 회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단체로 성장한 이유도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라 여긴다.

그러다보니 지난해 신생협회와 다름없는 뉴저지 경협회원들이 일치단결해서 거의 7년여 만에 세계무역인 협회(World-OKTA) 북미주경제인대회를 성황리에 개최, 전 세계 137개 지회에 뉴저지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월 회원들을 위한 정기 세미니, 주류 및 타민족 상공인들과 교류 등으로 뉴저지에서 가장 크고 모범적인 한인 단체로 성장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5년 자신의 모교인 인하대학교에 해외 인턴십을 제안했다. 모교 후배들에게 글로벌 감각을 길러주고, 미국의 기업문화를 체험시켜 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인하대가 해외 동문이 운영하는 기업에 재학생을 파견하는 해외 인턴십을 시행하게 됐다. 그도 현재 10여 년 동안 모교후배 40여 명을 자신이 운영하는 이코노보험에 채용했다. 지금도 4명이 인턴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 덕분에 이코노보험에서 해외 인턴을 마친 학생 대부분은 포철, 선경, 삼성물산, 현대해상화재보험, 하나, 신한은행 등 대기업에 취업했다.

1년 기간의 인턴 기간에 실무 중심의 경험을 키워준 덕분이다. 그는 현지 상공회의소가 주관하는 강좌나 세미나에 인턴학생들을 보내 국제상거래나 미국의 달라진 특허법을 배우게 했다. 미국의 투자환경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각종 세미나나 모임에 참석케 해 견문도 넓혀줬다. 뿐만 아니라 각 민족의 문화와 더불어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포츠 등 실로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해 준 것이다. 그가 인하대학교 해외인턴제도의 대부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현재 재미인하대학교 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다. 모교사랑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오늘 자신이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토양이 된 모교에 늘 고마운 마음이다 보니 이 일도 즐겨 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 지킴이

그는 1983년 성격이 활발한 아내와 결혼했다. 자신이 조용한 편이라 성격상 안 맞을 거라는 염려와 달리 오히려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 주고 있어 천생연분으로 여기고 있다. 날이 갈수록 이래서 짝이 필요한 것임을 실감하고 있다고. 자녀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그래픽디자인을 하는 딸과 보험업계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가꾸고 있는 아들이다. 그는 세상의 순리대로 살라는 가르침대로 잘 커준 자녀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그는 거주지인 잉글우드클리스에서 올 11월 선거에 공화당 시의원으로 출마했다. 정치가로 성공하겠다는 야망 때문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현안들을 개선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그에게 공화당 인사들이 4번이나 접촉해 와 수락했다. 지역 주민들과 힘을 모아 과도한 세금인상 방지, 지역 공공서비스 확대 등과 같은 주민들의 염원을 대변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목표로 달려가고 있다.

그는 현재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겉모습은 발전이 있었지만 내면적인 모습은 아직 인생의 첫 단추를 끼지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남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께서 기억해줄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연창흠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