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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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 전 언론인 · 뉴욕한인이민봉사센터 강석희 실장

2015-07-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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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 여생은 즐겁게 살고파”

18세에 한국전 참전, 전투중 수류탄 맞아 몸에 파편 박힌채 살아
삶의 희로애락 담은 스탠드업 코미디가 마지막 버킷리스트

▲아이언 맨
여름이 되면 상처가 욱신거린다는 사람이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강석희(83). 6.25는 그의 왼쪽 가슴에 특별상이기장 훈장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표창장을 받게 했지만 평생 몸 한쪽은 상처를 달고 살아야 했다.

“보인상고 졸업반이던 18세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국군 제1사단 수색대원으로 4월말에 임진강에서 중공군과의 전투 수행 중 수류탄을 맞았다. 눈을 다치고 귀가 다 찢겨나가고 오른쪽 가슴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같은 동네에 살던 흥식이는 죽었지만 나는 요행 살아남았다. 아직도 그 친구가 6월이 되면 눈앞에 아른거린다.”


강석희는 부상후 후송되어 서대문 야전병원을 거쳐 대전 육군 병원에서 다리 수술을 했으나 오른쪽 눈은 실명됐고 몸 안에는 여전히 제거되지 못한 파편이 남아있다. 두 번 이식수술을 한 눈은 반 정도가 보인다.

‘몸 안에 남은 파편 때문에 X-레이 같은 전자의료검사는 하지 못한다.’ 는 그는 자칭 아이언 맨( Iron Man)이다. 배고프고, 춥고, 죽음의 공포와 직면했던 6.25를 이겨낸 그는 “‘그때 잘못하면 죽었을 몸이다. 생명을 부지하여 다른 이도 돕고 살 수 있으니 고맙다. 내 삶은 복도 많고 운도 좋았다” 고 한다.

▲미국 언론계에 몸담다
서울 출생인 강석희는 어린 시절 인왕산 아래 세검정 일대 동네를 돌아다니며 살구나무 열매를 따먹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아버지가 일제하의 잠사회사 상무로 일하는 가정에서 5남매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어려서 돌아가셨다. 전상으로 명예제대를 한 후 53년 휴전이 되고 54년 유엔의 소리 방송에 입사, 그후 7년간 대북 방송 요원으로 일했다.

직장에 다니며 건국대 야간대학 행정학과를 56년 졸업한 강석희는 상이군인 출신으로 서울 이태원에서 미군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저절로 미국에 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나라가 가난해 전쟁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를 제대로 해 줄 형편이 안되었다. 상이군인들이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

1966년 베트남에서 ABC 뉴스 방송요원으로 2년간 일을 했고 1972년 미국에 왔다. 1973년 ABC 방송 뉴스 편집인으로 약 13년간 일했다.

“뉴스데스크부에서 근무하면서 월남전, 박정희 대통령 유고사건,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 등 굵직한 뉴스들을 다뤘다. 1988년에는 NBC 스포츠 방송으로 자리를 옮겨 88 서울올림픽을 취재 가 마라톤과 체조 경기를 전 세계 수십억 시청자들에게 생생히 전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당시 미동부 지역 미 방송계에 유일한 한인으로 일하던 그는 88년 후반, 30년이상의 언론계 생활을 마감하고 미 연방이민국 이민관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2년 가까운 이민관 생활에 이어 뉴욕시 이민 핫라인 전화상담관이 된다. 이때 한인사회로 들어갈 결심을 했다.


“한인들이 언어와 문화 차이로 적절한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이민사기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일을 많이 보았다.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사명감을 저절로 갖게되었다.”

▲뉴욕한인이민봉사센터 개원
강석희는 1992년 6월 25일 퀸즈 플러싱에 비영리단체 뉴욕한인이민봉사센터를 설립, 봉사실장으로 일하면서 언어소통의 불편과 생활정보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민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이민업무로는 무료 내지 염가로 영주권과 시민권 신청 대행, 가족이민 초청, 취업이민, 친지방문 초청, 각종 비자 연장 및 서류 대행을 해주었다. 특히 20년 가까이 무료 시민권 교육을 실시해 현재 만명이상의 이민자들이 시민권을 취득했다.

사회복지 업무로 저소득층의 생계보조와 의료혜택을 주선하고 실직, 질병, 약물중독으로 고통받는 한인들의 셸터 주선 및 숙박제공, 범죄 피해자 지원을 했고 미국에 적응 못하는 한인 홈레스 4명에게 한국행 여비를 마련하여 귀국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는 10년 이상 플러싱 한인밀집지역 7 커뮤니티 보드 멤버로 일주일에 두 번 모임에 나가 지역사회 봉사를 하는 한편 신규경찰에게 한국 역사와 문화강연을 하여 문화적 차원의 마찰을 예방했다.

뉴욕한인봉사단체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뉴욕북부 퀸즈보건연맹 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보건박람회를 여는 등 1999년부터 4년간 이민자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6.25 참전유공자회 명예회장
“2004년~2010년까지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뉴욕지회 회장, 현재 명예회장으로 1년에 1~2번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초청, 기념메달을 수여하고 오찬을 베풀어 위로와 함께 감사함을 표시해 왔다.”
그가 2003년 출간한 ‘미국이민 제대로 알고 떠나자’는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2007년에는 ‘미국, 한국 그리고 어느 이민자의 독백’ 등등 4권의 저서를 펴냈다.
그 중 2014년 출간한 ‘나라를 지킨 젊은 날의 회상’은 미군 5명, 한국군 18명 노병들의 참전 기억에 전쟁실록을 고증 기록한 것으로 영어와 한국어로 병기되었다. 강석희는 1992년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로부터 자유 이민자상, 1995년 엘리스 아일랜드 상을 받았다.

▲버킷 리스트
강석희·강은연 부부는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컴퓨터 엔지니어인 아들은 맨하탄에 살고 부부가 플러싱 164가 집에서 44년째 살고 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유니온 스트릿에 있는 사무실에 나갈 준비를 한다. ‘마나님 잔소리를 피해서’라기보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고, 봉사하고 섭섭하면 화도 내가며, 달콤하고도 씁쓸한 삶의 묘미를 누리고 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스탠드업 코미디(Stand-up Comedy)를 한인들 앞에서 펼쳐보이고 싶다. 그것이 남은 삶에서 하고 싶은 마지막 버킷 리스트 (Bucket List)다. ”

사실 강석회는 타고난 끼를 군대에 있을 때부터 발휘하여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장병들에게 잠시나마 웃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오래 전부터 친목회, 노인회,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즉흥 쇼를 펼쳐왔다. 소품은 바가지 하나. 그는 흥이 실린 사설을 풀어내며 자신의 머리를 치고, 바가지를 치고, 때로 옆에 앉은 사람의 머리도 빌려가며 점점 분위기를 고취시킨다. 다사다난한 인생, 특히 미주한인들의 이민사가 담긴 코미디물 수십 종류가 그의 머리속에 담겨있다.

“내 이야기는 성공한 이야기가 아니다. 슬프고도 웃기는 이야기다. 해방전 이야기는 일본어 버전으로 가능하다. 해방 후 혼란기, 월남한 스토리, 미국 이민 후 거듭 실패한 이야기 등등 내가 겪었고 주위사람들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미국 문화와 습관, 규칙을 몰라 실수한 이야기를 코미디화 시키며 ‘내가 왜 미국에 왔나’를 되풀이하며 콧노래를 부르면 이민자들은 너도 나도 손뼉 치며 울고 웃는다.

강석희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이번 여름 플러싱 금강산 연회장에서 펼쳐 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에 와서 그동안 잘 살았다. 앞으로도 즐겁게 살겠다.”는 강석희의 새로운 노후가 기대된다. <민병임 논설위원> <사진 조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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