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 발발 65주년 특별기획-내가 겪은 6·25
▶ 임진강 전선 지켜낸 살 스칼라토 뉴욕주한국전참전용사회장
미 해병대원들과 상륙 즉시 임진강 전선 투입
죽일 수밖에 없었던 중공군 소년의 눈 잊을 수 없어
“전쟁터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내가 살기위해 적군을 죽이는 일 뿐이었어요. 아직도 그때의 악몽이 매일 떠오릅니다. 생지옥 같았던 그 순간들이 결코 지워지지 않아요.”
살 스칼라토(사진·82) 뉴욕주 한국전 참전용사회장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침묵 속에 수십 초를 흘려 보냈다.
그에게 한국전쟁이란 자유 민주주의를 목숨 바쳐 지켜낸 자랑스러운 기억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고통스런 상처이기도 하다. 스칼라토 회장은 애써 눈물을 참은 듯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중공군이 북에서 물밀듯이 내려오던 1952년 4월. 해병대 신병 교육과 특기교육을 수료한 스칼라토 회장은 매튜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의 지휘 하에 4만5,000명의 해병대원들과 함께 인천에 상륙했다.
"배가 인천에 닿을 즈음 바람에 실려 온 화약 냄새와 함께 전장의 공포를 피부로 느꼈다"는 스칼라토 회장은 "상륙 후 중공군의 주 저항선이었던 임진강 전선으로 곧장 투입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첫 전투의 기억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인천을 출발한 트럭은 북으로 계속 이동했습니다. 퍼붓는 빗 속에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두 참호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죠. 지천을 뒤덮은 중공군들이 피리를 불고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빗발치는 총알세례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고 바로 옆의 전우가 내 가슴팍 위로 쓰러졌습니다. 피가 솟구쳐 오르는 그 동료의 배를 두 손으로 눌러대며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죠."
전쟁을 소설과 영화로만 배워왔던 19세 청년에게 실제 전쟁터의 모습은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역시 조금씩 지옥에 적응해 갈 수 밖에 없었다. 스칼라토 회장은 1952년 9월께 임진각 북쪽 전선에서 벌어진 중공군 부대와의 백병전을 회상했다.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중공군 병사가 칼을 들고 참호 속으로 뛰어들자 엉겁결에 쓰고 있던 철모를 집어 던졌다"는 스칼라토 회장은 "소년병이 피하는 사이 휘두르던 칼을 빼앗아 그의 가슴을 찔렀다"며 "고통에 신음하는 그 소년의 눈을 보며 이것은 명백한 살인이라는 죄책감이 가슴을 후벼 팠다"고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스칼라토 회장은 "만약 내가 그 소년을 죽이지 않았다면 결국 내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말로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적군이 던진 수류탄이 눈앞에서 터져 목과 팔,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던 스칼라토 회장은 그 이후에도 8개월이나 더 전선에 머무르다 1953년 3월 집으로 돌아왔다.
스칼라토 회장은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에 침략에 맞설 수밖에 없었던 피할 수 없던 전쟁이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이 같은 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전쟁터는 현실 세계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세상"이라고 말했다. <천지훈 기자> A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