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불과 몇십 미터 앞에서...전우들 시체가 하늘 위로

2015-06-20 (토)
크게 작게

▶ ■한국전쟁 발발 65주년 특별기획 - 내가 겪은 6·25

▶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극적 생존한 전재구 장군

불과 몇십 미터 앞에서...전우들 시체가 하늘 위로

전재구(오른쪽 다섯 번째 작은 원안) 장군의 특무대 근무시절. 오른쪽 첫 번째가 박정희 전 대통령(큰 원안), 오른쪽 두 번째가 김창룡 특무대장이 함께 했다.

북한군의 남침 기습이 있은 지 이틀째 되던 1950년 6월27일 밤. 서울 용산 육군본부에서 상황장교로 근무하던 전재구 당시 중위(현 예비역 준장·87세)에게도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면서다. 족히 수만 명쯤 돼 보이는 피란민을 뚫은 그의 지프차가 한강 인도교 중간에 도달한 건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그 때였다. 불과 몇십 미터 앞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하늘이 뚫려있는 그의 지프차 위로 으스러진 사람 뼈 조각과 피 그리고 엄청난 먼지 더미가 뒤엉켜 쏟아져 내렸다. 앞서가던 친구이자, 같은 육사 8기인 김인서 중위의 몸도 여기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같은 편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도, 아니 아직 건너지 못한 아군이 많은데도 다리를 폭파한 거에요. 당연히 저쪽(북한군)에서 터뜨린 줄 알았지. 그 때 많은 사람이 죽었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80대 노병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황급히 일어났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 탓이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전 장군은 눈물을 보인 게 머쓱했던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가는 여전히 젖어있었다.

■“38선이 터졌다”=전쟁 발발 하루 전인 6월24일. 전 장군은 육사 동기 2명과 함께 자취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을 지새웠다. 고된 군 생활 중 맞이하는 주말 휴식은 달콤했다고 전 장군은 기억했다.

심지어 자취방 벽을 타고 이동하는 빈대 20여 마리를 보면서 “인민군 전차가 줄지어 내려오는 것 같다”는 농담도 당시엔 여유로웠다. 실제 그런 일이 불과 몇 시간 후 벌어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하숙집에 전화가 걸려 와서 받았더니 상황실 당직을 서던 동기 김종필 중위야. 38선이 터졌대. 장난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친구 목소리가 심상치 않더라고. 그 길로 육본으로 달려갔지.”

육본 지하실에 있는 상황실로 내려간 전 장군은 그날부터 꼬박 이틀을 식사와 잠도 거른 채 전화와 지도를 붙들고, 전장 상황을 체크했다. 물론 당시 기습공격을 당한 우리 군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칼빈 소총이 사실상 유일한 무기인 아군에게 북한군 탱크는 무서운 존재였다. 상황실에 설치된 지도는 북한군을 의미하는 빨간색으로 점차 물들어갔다.

“물론 사기가 오르는 순간도 있었어요. 춘천에서 내 육사 동기생 하나가 전차에 몰래 올라 수류탄을 안으로 던져 넣어서 모두 4대를 부쉈대. 상황실에서 모두 만세를 부르곤 이 사실을 전 부대에 전파했어. 너희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였지.”
그러나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의정부가 무너지더니 결국 미아리까지 북한군이 뚫은 것이다. 서울을 사수하라는 맥아더 장군의 지령이 있었지만, 결국 전 장군을 비롯한 육본 근무자들은 권총 하나씩만을 챙긴 채 한강 이남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강을 건너야 한다”=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 극적으로 목숨은 건졌다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다리를 건너야 당시 임시 육군본부가 설치된다던 시흥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밝자 한강 인도교 북단에는 북한군 전차가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강가 아래에는 강을 건너지 못한 피란민 수십만 명이 몰려있었다. 간간이 누군가 구해온 작은 배가 강가에 접근했지만 30~40명이 탑승하는 바람에 10미터도 못가서 물에 가라앉았다.

그런데 물에 빠진 이들은 서로 붙잡고, 놓아주질 않느라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이런 광경을 전 장군은 하루 종일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다. “같이 있던 군 선배 한 사람이 나를 보고 그래요. ‘전 중위. 우리 같이 자살하자!’ 그래서 난 결혼도 못해봤다고 했어. 죽더라도 싸움이라도 하다가 죽어야 덜 억울할 거라고. 싫다고 거절했지.”

그러나 이 말이 끝날 때 즈음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 사내가 배를 하나 구해올 테니 자기 가족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해 온 것이었다. 너무 많은 피란민들이 탑승하지 못하도록 군인으로서 통제를 해달라는 말이기도 했다.“그렇게 살았어. 그 때 강을 못 건넜다면 아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거야.” <함지하 기자>


■전재구 장군은

6·25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수색대에 소속됐던 전 장군은 피란민에 섞인 간첩 색출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후 백선엽 당시 2군단장의 수석부관이 됐으며, 백 군단장이 육군참모총장을 맡을 때까지 수석부관으로의 역할을 했다. 휴전 후에는 김창룡 특무대장이 이끌던 특무대 보안처장직을 맡았고, 박정희 정권 때는 중앙정보부에서 요직을 맡았다. 군복을 벗은 후에는 9대 국회의원과 대한준설공사(현 한진중공업) 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2004년 도미, 뉴저지에 거주하고 있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