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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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하용화 전 한인회장·솔로몬 보험그룹 회장

2015-06-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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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만나면 그게 바로 행운이죠”

30여 년 전 기다란 맨빵 한쪽과 물 한 병을 점심으로 뉴욕 곳곳을 누빈 세일즈맨 출신 하용화 솔로몬 보험그룹(Solomon Agency Corp) 회장이 지난8일 미주한인 최초로 워렌 버핏과 한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파란만장한 경험이 모두 재산이라는 그를 만나본다.

▲기회는 얼마든지 온다
하용화는 “사람은 살아보니까 어차피 돕고 사는 것이더라.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게 되어있다. 더 중요한 것은 기회는 얼마든지 온다는 것,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만나며 그게 바로 행운이다”고 말한다.

분초를 다퉈 살만큼 바쁘다보니 그의 말은 빠르다. 그러나 단 하나 버릴 것 없이 영양가 가득하다. 1992년 솔로몬 보험 설립 이후 한인들의 작고 큰 비즈니스를 보호하고 최대한 고객을 만족시키며 회사도 승승장구 발전했다.


“90년대 중반 보험 도매를 시작한 것이 성장의 길이 되었다.”는 그의 말처럼 초창기에는 생명보험, 얼마 후 자동차, 가게보험 등 다양한 분야의 보험을 시작했다.

기존의 보험회사에 1998년 한국 보험브로커들도 수용한 IUA(International Underwriting Agency), 2007년 개인과 그룹의료보험 E-BENEFIT, 2012년 인스펙션 컴퍼니를 각각 설립, 현재 4개의 회사를 거느린 솔로몬 보험그룹은 뉴욕본사와 뉴저지지사에 60여명 직원들이 일한다. 지난 4월 한국지사 개설에 이어 앨라배마 지사도 오픈했다.

또한 하용화는 역대 한인회장 중 가장 눈부신 활동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년 5월1일 제31대 뉴욕한인회장으로 취임, 30~40대 2세들을 수십 명 영입했고 2년 임기동안 한인사회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쳤었다.

▲큰 세상을 보고 싶다
하용화는 충남 부여 세도면 출생으로 우체국장 아버지, 양재학원 원장 어머니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0~100명 되는 원생들 앞에서 원장의 어린 아들이 노래도 하고 맘보춤도 추니 다들 예뻐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 앞에 선 것이 자신감을 갖게 했다.”
72년 온가족이 대전으로 이사 했고 하용화는 대전 보문 중·고등학교, 경기대학교에서 관광경영학과를 전공했다.

“뭐든지 한 번에 된 적이 없다. 대학도 재수, 삼수, 1차, 2차를 거쳐 다섯 번째야 합격했고 대학도 2년제 경기대 초급대학으로 들어갔다가 3학년으로 편입했는데 그때 ROTC를 한 것이 리더십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82년 대학 졸업 후 전방에서 복무하는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고 제대 후 중외제약 영업부에 취직했다. 일본 중외제약 연수를 다녀오며 해외에 눈뜰 무렵, 회사 주최 안병욱 교수(숭실대)초청강연회가 열렸다. 당시 62세 노교수는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는 운전, 컴퓨터, 영어회화를 해야 한다’고 강연했다. 이 말은 멀리, 높이 나르고 싶은 젊은이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멀리 큰 세상을 보고 싶다’던 젊은이는 운전을 배우고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운전면허 시험에 17번 떨어지고 겨우 붙었다. 토플시험도 세 번 떨어지고 롱아일랜드 대학 랭귀지 코스에 조건부 입학했다. ”

▲샐러드바, 튀김가게, 세일즈맨
하용화는 29세 나이인 1986년 1월 미국으로 왔다. 퇴직금 600만원을 갖고서.
“한국에서 재떨이까지 다 넣은 커다란 가방을 7개 갖고 J. F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 도착하니 아무도 날 반기지 않았다.”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그를 마중 나올 줄 알았다고 한다. 커다란 이삿짐 수준 짐 속에 오랜 시간 망연히 앉아 있는 그 옆을 한 젊은 한인이 지나가며 물었다. “잠잘 곳이 없냐?”고. 그는 청년의 권유에 그 많은 짐을 들고 따라갔다. 주차장에 건설업체 소규모 밴이 있었다. 낯선 이들의 도움으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날 아침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

"5월까지 수업료 내고 기숙사비 내니 갖고 온 돈이 다 떨어졌다. 방학이 되어 맨하탄 샐러드 바에서 12시간씩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노동절 연휴가 지나 학교로 돌아가 숙식을 제공하는 기숙사 사감 RA(residence adviser)에 지원했다. 영어가 시원찮아 떨어졌다."

차가운 현실을 실감한 그는 엘머스트 지역에 살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학교를 다녔다. 방 하나에 10명이 잠을 자는 곳이었다. 금·토·일요일은 브롱스의 튀김가게에서 일했고 인쇄소에서 캘린더 세일즈맨을 하기도 했다.

또 35가 맨하탄백화점에서 한국 수입상품을 받아서 병풍과 한복 인형을, 개인 수입업체의 민병철영어 비디오와 사우나 기계도 팔러 다녔다. 열심히 일하니 먹고사는 것은 해결되었으나 영어가 늘지 않았다. 기숙사 사감 자리에 들어가고자 6개월, 또 6개월, 1년 반을 기다리고 노력한 결과 87년 하반기에 존 터너 역사학교수의 도움과 달달 외운 인터뷰로 통과, 롱아일랜드 대학 한인최초 기숙사 사감(RA)을 지내기도 했다.

“1987년~1988년 가장 힘들었다. 학교에서 준 아무 것도 안든 빵과 수돗 물병을 점심으로 지참하고 한인 가게 아무 곳이나 모두 들어갔다. 가게 일을 도와주고 영어가 서툰 주인을 대신 해 아이 학교 모임에도 대신 가주고 하다 보니 처음엔 야, 너 하고 부르던 주인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유학은 왔지만 앞날이 안보이던 시절, 끈질긴 의지와 노력으로 4년을 버텨 드디어 MBA 과정이 끝나고 89년 5월 졸업을 했다.

▲2세들의 멘토
하용화는 고학시절 자신도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다른 이를 도와주면서 ‘봉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들은 모두 그의 고객이 되었다.
89년~92년까지 미국보험회사(Mutual of NY Insurance Company)를 다니고 92년 6월 보험 라이선스를 받자마자 플러싱 메인스트릿에 솔로몬보험을 창업했다. 비즈니스를 키워나가면서 1993~1998년 플러싱한인회 수석부회장과 이사로 1999년 플러싱 한중합작 음력설 퍼레이드를 시작하고 영어교육, 야학을 열었다.

1995~1996년 뉴욕시개발위원회 커뮤니티보드 멤버, 2003년~2005년 제5대 뉴욕한인보험재정협회장, 2004년 뉴욕한인직능단체협의회 회장, 2006년 대뉴욕ROTC 제27대 회장, 2004년~2008년 미주한인청소년재단 제3대 회장, 월드옥타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현재 그는 한인 2세뿐 아니라 한국의 초청 강연으로 젊은이들의 멘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가 받은 ‘50 아웃스탠딩 아시안아메리칸스 인 비즈니스’(2012년), 엘리스아일랜드(2013년)상..등등은 땀 냄새 물씬한 그의 이민사에 비하면 숫자 나열에 불과하다.
하용화는 최근 USLI 보험사가 초청한 40개의 보험중개회사 대표 부부 및 직원 만찬에 부부 동반으로 오마하의 메리엇 호텔에서 워렌 버핏과 저녁을 함께 했다.

▲에스더 하 재단
하용화는 87년 하금숙과 결혼, 1남 2녀를 두었으나 작년 2월 우울증을 앓던 큰딸을 잃은 후 에스더 하 재단을 만들었다.

“한인사회에 제 딸과 같은 우울증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 재단을 설립했다. 지금도 아프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 대학을 다니다 휴학 중인 딸, 모든 가족이 마음을 회복 중이다.”

아내 하금숙은 지난5월 수필 ‘킹의 날’로 한국문단에 데뷔, 글을 쓰면서 큰딸을 잃은 마음을 풀어나가고 있다. 에스더 하 재단은 마음클리닉, 세미나, 웹사이트를 통해 우울증 정보를 알려주고 있고 오는 7월에는 보험관련 거래처 초청 기금모금 갈라 행사, 9월18~19일에는 뉴저지와 뉴욕에서 제2회 톡톡 힐링콘서트를 연다. 향후 5년 안에 정신 클리닉 문을 열 예정이다.

“커뮤니티 봉사는 자기 욕심 없이 내가 기쁘니 하는 것이다. 직원들과 같은 비전으로, 같이 갈 때 행복하다. 솔로몬 창립기념일에는 전 직원과 너싱홈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는 그다.

삼국시대 유비는 밑바닥 생을 살 환경에서 벗어나 인생역정을 거쳐 촉한 황제가 되었다. 인간적 약점이 많았던 유비에서 본받을 것은 좌절해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백절불요(百折不撓)의 정신이다. 매사 열정적이고 낙관적인 하용화를 성장시킨 비결이 바로 이 백절불요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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