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미국 동부를 여행하다 사진으로만 보던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미국이 자유의 나라임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세계를 밝히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를 구가하는 이 여신상의 효험은 무엇이며, 전 미국 거주자 아니 전세계인이 이 여신이 의미하고자 했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많은 추상명사가 그렇듯 ‘자유’라는 말도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하며 쓰이는 용도가광범위해서 간단히 논평하기가 쉬운 주제가 아니다.
그리고 또 장소나 시대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달랐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여기서 자유의 억압적 전제가 되는 것은 ‘남의 구속’과 ‘얽매이는 무엇’이다. 한국 근대사를 돌이켜볼 때 일제 36년의 식민지 통치 밑에서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구속을 받아오다 8.15 해방과 함께 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 후 이승만 독재 정권이나 군부 철권 통치 밑에서 인권마저 유린당하던 상황에서 헌법에서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학생들과 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려 정치적 자유를 획득해 내었다.
불행히도 남북이 분단된 이래 북한은 일인 독재의 전제주의 식 공산주의를 택함으로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 3대째 독재 체제를 유지하며 21세기에 찾아보기 힘든 인권 유린과 극단적 자유 통제의 정치 제제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의 자유민주를 표방하며 자본주의를 택한 남한의 온 국민은 지금 절대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전적으로 ‘예라고 답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유의 억압적 전제의 후자, 즉 ‘얽매이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특징인 무한 경쟁과 빈부의 격차로 인하여 대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삶을 위해 ‘돈’에 얽매여 일생 동안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는 불행에 빠지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평생 노예같이 일해도 노후에 조용하고 평안한 나날을 보낼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가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자유는 어떤 한 분야, 한 계층에서 논의되는 한계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최근에 대두되는 ‘상관자유론’은 자유를 올바로 이해하고 진작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민적 자유, 정치적 자유, 시민적 자유, 사법적 자유, 경제적 자유, 집단적 자유 등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두가 통합해서 더 완벽한 총체적 자유를 형성해야 되며, 자유가 한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도와 함께 보다 나은 자유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셨을 때 그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자유와 진리와의 관계성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문맥상으로 제자도 및 죄와 관련 속에서 자유를 언급하셨지만, 이 말씀을 21세기 자유와 관련된 현장에 적용시킨다면 아마 이런 말씀이 될 것이다.
”너희가 진리된 내 말을 믿고 지키면, 내 제자가 되어 하나님이 원초적으로 원하셨던 참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되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심어주신 고유한 잠재 능력을 증진시켜, 그 독특한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그 어떤 타인에 의한 억압이나 간섭이나 지배 받음 없이, 타인과 사랑으로 결속하고 자신이 희망하는 삶을 자유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천주교에서 믿는 기적을 일으키는 성모 마리아 상처럼 모든 인류에게, 참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류가 하나같이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가르친 교훈을 지켜나가며 진리 위에 설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참 자유가 반석 위에 세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