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김문철 목사 ㅣ 황교안 19금

2015-06-10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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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의 청문회 소리만 들으면 왠지 취조실 그림이 떠오른다. 쫓고 쫓기는 고양이와 쥐가 연상되기때문이다. 청문회란 원래 문자 그대로 듣는 데 초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전문가들의 의견을 잘 듣고서 업무수행능력을 검증하는 자리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법의 돋보기로 수십년전 실수까지 탐색하면서 흠집내기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정당 정치의 현상만으로 보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권위문화의 영향일지는 몰라도 한국은 유난히도 법조항을 즐기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름만 들어도 귀가 솔깃한 법들이 많다. 전두환법(공무원 범죄재산 몰수), 조두순법(성폭력 특례), 최진실법(자동 친권 금지), 유병언법(범죄수익 은닉 규제), 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 외에도 마스크금지법, 때법방지법, 선행학습금지법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물론 모두가 질서를 잡고 범죄를 줄이기 위한 법조항들이다.

하지만 법조항이 많아진다고 질서가 잡힐까? 법의 그물이 촘촘하다고 범죄가 줄어들까?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지난 20년간 전 영역에서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양극화 현상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 현상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성경도 법조항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성경시대의 그 많은 법조항들이 그당시 질서와 정의를 만들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무질서와 불의함으로 가득했다. 법의 한계이고 법의 아이러니다. 왜 그럴까?

마가복음 12장에 나타난 한 법학자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에 대한 열쇄를 제공한다.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 한명이 예수께 법에 대해 질문한다: “선생님, 법중에 최고 법이 무엇입니까?”(28)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이웃사랑 보다 큰 법이 있겠소?”(31) 그러자 서기관도 이를 인정한다: “맞습니다 선생님, 이웃사랑이 제사보다 우월하지요”(33) 하지만 서기관의 대답속에는 여전히 오만함이 담겨있다. 이웃사랑을 복잡한 제사법과 비교한다. 자기의 법적 탁월함을 과시하려는 의도다. 자기 의로 가득한 의식 속에 이웃사랑이 차지할 공간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예수께서 비꼬면서 한방 먹이신다:“네가 천국에서 멀지 않도다”(34) 천국은 은혜로 가는 곳이다. 그래서 가깝고 멀고가 없다. 단지 들어가고 못들어가고만 있을 뿐이다. 천국에서 가깝다는 말은 결국 천국과 상관없다는 말이다. 일종의 반어법이다. “너를 살려야 할 법이 오히려 너를 죽이는구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이다. “사랑 없는 법은 법이 아니다”를 전달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며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이 세상에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그래서 사랑이 법중에 최고 법이다.

이번 황교안 인사청문회 핵심골자가 황교안19금 (전관예우성 미공개 수임 19가지 기록 삭제) 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황교안19금이 당사자인 황교안에 의해 만든 황교안법 (전관예우 수임 규제) 과 맞물린다. 부정을 막기 위해 법을 세우고, 또 그 법을 무력화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법을 이용하는 꼴이다. 아무튼 온통 법투성이다. 과연 황교안법으로 황교안 19금을 잡을 수 있을까?

신학자 한스 큉은 ‘촘촘한 그물일수록 구멍이 많다’고 했다. 법은 또 다른 법으로 무너진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12시에 말뚝 박아도 그림자는 생긴다. 잘못된 것도 사랑으로 무조건 덮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누구도 예외없이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법이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 아닌 죽일 목적으로 사용되면 이미 법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부디 청문회가 도덕적 검증과 업무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기회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과정이 본질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전제속에 이루어졌으면 더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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